1. 머리말
인간의 삶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생각하는 대로 사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사는 대로 생각하는 삶이다. 생각하는 대로 사는 사람은 생각을 가지고 삶을 지배하지만, 사는 대로 생각하는 사람은 환경에 의해 삶을 지배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생각을 품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생각을 품어야 하는가가 더욱 중요하다. 생각은 알과 같다. 닭이 알을 품으면 병아리가 나오지만 독사가 품고 있는 알에서는 독사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바른 생각을 품으면 하나님의 원하시는 열매가 맺히지만 잘못된 생각을 품으면 잘못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식론적 전제는 중요한 것이다. 무언가를 인식하기 위해 전제를 가진 다는 것은 그 인식을 올바르게 한다는 출발점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가 따르는 개혁주의 신학이 바탕이 된 인식론적 전제를 가진 다는 것은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최상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첫걸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와 같은 철학자들은 이성의 자율성을 주장하며, 인식론적 전제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그리고, 인식론적 전제를 인정하면서도 바르지 못한 전제를 품고 출발하는 많은 개신교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본인은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간단한 정의에 이어 인식론적 전제의 필연성을 역설한 후, 개혁주의 신학의 인식론적 전제란 무엇인지에 대해 말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탕이 된 신앙생활은 어떤 신앙생활이 되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성보다 감성을, 생각보다 느낌을 중시하는 이 세상 속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인식론적 전제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오늘날 현대인들도 소수 엘리트층이 만들어 낸 여러 가지 인식론적 전제 속에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 전제들이 음지에서 일부에 의해 만들어져 감성과 느낌의 포장지 속에 감춰져 우리에게 전달되기 때문에 모르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인식론적 전제의 탁류(濁流) 속에서 바른 인식론적 전제, 특별히 개혁주의 신학의 인식론적 전제를 바르게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전제를 바탕으로 해서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을 기쁘게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을 통해, 개혁주의가 무엇인지, 인식론적 전제는 왜 필요한지, 개혁주의 신학의 인식론적 전제란 무엇인지, 또 그것을 바탕으로 어떻게 신앙생활 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 보고, 깨어 있는 신앙인의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란다.
2. 본 문
2-1. 개혁신학
2-1-1. 16세기 개혁파의 시작
개혁파라는 말은 루터파에서 처음으로 이름을 붙였다. 복음주의는 로마교가 붙힌 말이다. 1517년 종교개혁 40년 후, 1560년까지는 Reformed라는 명칭은 ‘개신교’ 또는 ‘복음주의’였다. 여기에는 루터파 까지 포함되었다. 그러나 1590년대에 가서 구별이 생기게 된다. 루터파와 나머지 파의 구별이 생긴다. 그것은 바로 루터파 안에 일치신조가 나오면서부터인 것이다. 루터파 안에 1580년에 [일치신조]가 확정되면서, 루터파의 성찬론, 기독론(속성 교통)을 따르지 않는 무리를 ‘개혁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즉, 복음주의자이기는 한데, 기독론과 성찬론에서 차이를 보이는 무리를 개혁파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이후 루터파는 급격히 알미니안화 되어 버리고 만다. 그리고, 1648년 30년 전쟁 후 웨스트팔레아 조약 후, 독일 내에서 개혁파는 인정을 받게 된다. 초기 개혁파는 뚜렷한 인식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루터파 외의 사람들을 불렸다. 영국의 성공회, 알미니안 주의, 감리교회도 당시에는 개혁파에 들어갔던 것이다.
2-1-2. 통시적 관점에서의 개혁파
그리고, 통시적 관점에서 개혁파를 정의해 본다면 아래와 같다. 개혁파란, 한마디로 말해 ‘쯔빙글리(쮜리히)’, ‘블링거’, ‘칼빈(제네바)’, ‘알 라스코’ 같은 사람들이 세운 사상체계를 따르는 사람들을 말한다. 분포는 스위스, 네덜란드, 동유럽 등 유럽 대륙 전체에 분포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로 이주하였다. 유럽에서 미주로 이주하면서 16세기 개혁파의 신학의 변화가 생겨나게 되었다. 강조점을 달리하는 세가지 범주의 개혁파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2-1-3. 미국에 들어가 분파된 개혁파
미국에 들어가 분파된 개혁파 중 첫 번째는 [정통적 교리주의]로 신조주의, 고백주의라고도 한다. 이 분파는 기독교 교리를 충실히 고수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로 교리를 규정하고 있다. 이 교리주의는 칼빈주의, 청교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가지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미국에 건너와 구파와 신파로 구분된다. 구파는 구프린스턴파로 엄격한 장로교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고백적이다. 그러나 1758년에 구파와 신파가 결합되었다. 서로 배타적이면서도 포용적이다. 이에 속하는 그룹들은 구프린스턴신학교, 매코믹 신학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PCA교단 등이 있다. 두 번째 분파는 [문화주의]인데 신파로 불린다. 신파는 미국 2차 대각성운동과 관련한 파이다. 신파에 속하는 사람들이 보이는 모습으로 경건주의적 성향을 띈다. 이에 속하는 그룹들은 무디, 휘튼대학, 풀러신학교, 트리니티신학교, 고든콘웰, IVP, 크리스천투데이 등이 있다. 천년왕국에 대한 개념은 역사적 전천년설을 따랐다. 일부는 무디의 영향을 받아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자들도 있었다. 세 번째 분파는 [경건주의] 인데 복음주의보다 큰 범주로 다양성을 관용적으로 받아들이고, 전도에 열정적이며, 개인적 경건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나중 신파에 합류되게 된다.
이런 미국 개혁파의 분파는 위치적으로 남부는 교리주의인 구파로 북부는 문화주의, 경건주의인 신파로 구분되게 된다. 그리고 1870-1890년 미국사회 세속화로 인해, 근본주의자와 현대주의자의 분열이 일어나게 되는데 신파에서 자유주의가 번성했다. 그리스도 대속, 성경 무오를 자유주의는 반대한다. 그러나 근본주의자에 구파가 속하여 신앙의 정통성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2-1-4. 한국 내 개혁파 양상
이런 미국 개혁파의 상황 속에서 한국에 복음이 전파되었다. 그러면서 한국 내에도 자연스럽게 구파, 신파가 나눠지게 되었다. 한국 초기 선교사들은 성경관에 있어서는 구파적이었으나, 신조나 태도에 대해서는 신파적이었다. 초교파 집회가 무디 영향을 받은 것으로 바로 그런 예이다. 구파적 양상을 지닌 한국 내 개혁파는 박형룡, 합동, 대신, 합신, 고신교단 등을 들 수 있겠다. 그리고 신파적 양상을 지닌 한국 내 개혁파는 기장교단과, 박윤선박사 등을 들 수 있겠다. 박윤선 박사를 신파로 분류하는 이유는 화란에서 공부하고 와 신앙을 삶 전 영역에 적용하려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2-1-5. 개혁파의 신학
이러한 개혁파의 성격을 규정짓는 사상적 특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첫째로는 하나님의 주권 사상으로 가장 중심이 되는 사상이다. 둘째로 성경의 절대권위를 인정하며, 셋째로 예정교리를 고수한다. 넷째로 설교중심의 예배를 드리고, 다섯째로 성화를 성찬 참여의 조건으로 보기 때문에 구원론에서 성화를 강조한다. 여섯째로 예정론, 주권사상과 관련해 하나님의 언약을 강조하고, 일곱째로 하나님의 영광을 삶의 최종목표로 삼는다. 여덟째로 정치제도가 주로 장로정치를 받아들인 대의정치체제이긴 하나 위계적인 정치는 반대한다. 즉 장로를 위계로 이해하지 않고 대중으로부터 나와 권세는 있으나 섬김이 목적이고 군림하지 않는 사람이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헨리 미트의 책 [칼빈의 기본사상]이란 책에서 개혁신학에 대해 잘 정의하고 있다. 헨리 미트는 개혁신학을 칼빈주의라고 말한다, 그리고, 칼빈주의란, 칼빈으로부터 이어져 오는 교리를 가진 교파인데, 이말의 의미는 거슬러 어거스틴, 바울, 성경으로 돌아갔다는 의미라는 뜻이다. 그리고 칼빈주의란, 하나의 통일적 사상체계라고 말한다. 그러나 칼빈 이후 많은 후학들의 사상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사상들을 총합했다는 의미의 통일적 사상체계가 아니고 칼빈의 전제를 공유한다는 것에서 통일적 사상체계라는 것이다. 즉, 성경적 체계 속으로 돌아온다면 침례교회, 감리교회 속에도 칼빈주의가 있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헨리 미트는 개혁주의란, 신학만이 아니고 모든 사상체계라고 말한다. 즉, 음악, 정치, 철학, 과학 등 모든 것의 사상체계를 포괄하고 세계관을 개혁주의 신학이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2-2. 인식론적 전제
2-2-1. 인식론적 전제의 정의
인식이란 사물을 인지(認知)·식별(識別)하고, 기억·사고(思考)하는 작용 및 그 결과를 말한다. 그리고 전제란 어떠한 사물이나 현상을 이루기 위하여 먼저 내세우는 판단을 말한다. 이를 종합해 보면, 인식론적 전제란 사물을 인지, 식별, 기억, 사고하기 위해 미리 내세우는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2-2-2. 철학의 인식론적 전제들
먼저 17세기 데카르트로부터 출발한 대륙의 합리론자들의 인식론적 전제는 ‘선험적 진리’이다즉, 이성을 가지고 선험적 진리를 전제로 해서 사물을 연역하는 방법을 쓴 것이다. 그러나 선험적인 진리를 발견했다고 해도, 그것에서 연역되는 것은 변변치 않은 것들이다. 예를 들자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합리론적 명제에서는 어떤 구체적인 것도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선험적 진리로는 인간 내적 실존에 대한 탐구는 가능할지는 몰라도, 밖의 실제 세계에 대해서는 어떠한 것도 연역해 낼 수 없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베이컨, 흄으로 이어지는 18세기 경험론자들의 인식론적 전제는 ‘경험을 바탕으로 한 가설’이다. 이 가설을 가지고 귀납적 방법으로 인식을 펼쳐 진리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설-검증’의 방법으로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가? 많은 진리들이 경험적 논증의 과정 속에서 그들의 지식을 포기하는 오류를 낳을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자면 “인간은 죽는다”는 명제를 입증하려 할 때, 경험론은 미래를 경험할 수 없기에 오류를 낳을 수 밖에 없다. 미래에 관한 어떠한 진술들도 입증할 수 없는 것이다. 윤리적 가치의 문제도 평가는 할 수 있으나 입증할 길이 없다. 이유는 감각을 통해, 경험을 통해 나온 것은 윤리적 가치, 즉 초경험적인 것들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기에 검증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현대철학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사람이 임마누엘 칸트이다. 칸트는 독단적 합리론, 경험론에 갇히면 참된 지식을 인식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태생적으로 부여한 사유의 범주인 ‘사유의 12범주’를 통해 판단할 때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하며 합리론적 견해를 피력한다. 그리고, 흄의 책을 통해 독단의 잠에서 깨어나 날 때부터 사유의 능력이 있다고 해도, 본체적 세계(경험과 구별된 실체세계)에 대한 객관적 사실들은 감각적 경험을 통해서만 획득된다고 말했다. 칸트는 인식대상이 없는 사유는 공허하게 된다는 합리론의 단점을 극복했을 분 아니라, 경험은 있으나 개념화 할 능력이 없어도 공허하게 된다는 경험론의 단점도 극복한 것이다. 그래서 칸트는 지식을 습득하는 일과 축적하는 차원에서 형식을 확립하는 합리주의, 재료를 수집하는 경험주의로 종합하여 지식체계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칸트는 하나님은 그런 존재가 아닌 순수한 영이시기에 감각을 통해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없고, 사유를 가능케 하는 12범주는 감각을 초월한 영역에는 적용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은 불가지한 분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순수이성이 아닌, 실천이성, 신앙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칸트는 이성의 한계는 인정하면서도 이성의 자율성은 끝까지 주장했다. 그런데, 이성의 자율성을 주장한다는 것은 곧, 이성작용에 있어 전제란 불필요하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깊게 생각해 보면, 이성의 자율성이라는 말 자체가 칸트의 전제가 아닌가? 그래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이런 칸트의 발언의 모순을 밝혀냈다.
2-2-3. 칸트의 인식론적 전제 부정에 대한 반론들
불트만은 “전제 없는 논의는 불가능하다.”라고 말했다. 바빙크는 모든 학문이 전제와 인식에서 출발한다고 말하면서 전제는 학문을 가능하게 하는 출발점이 된다고 말한다. 즉 원인이 전제가 되는데 원인은 출발점이 되고, 변화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빙크는 하나님이 우리의 신학함의 전제이자 원리라고 말한다. 도예베르트는 [서양신학의 황혼에서]라는 책에서 칸트의 [이성의 자율성]은 이성의 자율성이란 전제를 깔고 하기에 모순에 빠져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도예베르트는 인간은 종교적 전제를 깔고 실존을 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을 증명해 낼 수 없는 모순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 모순을 극복한 방법은 “부인할 수 없다”이다라고 말한다. 즉, 인간은 반드시 유신론, 무신론, 불가지론 중 하나에 속하게 되는데, 그것 자체가 인간이 종교적 실존임을 나타내는 증거인 것이라고 도예베르트는 말한다. 그리고 도예베르트는 칸트든지 모든 철학자들은 이성이라는 바탕 위에 출발하고 있다면 같은 결론에 도달해야 하는데, 작은 차이에도 학파가 나눠지는 것을 볼 때, 이성이 전부가 아니라, 더 깊은 종교적 전제가 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온다고 이야기 한다.
위의 견해들을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인식론적 전제 없는 논의나 사상, 학문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2-3. 개혁주의 인식론적 전제
2-3-1. 개혁주의 인식론적 전제
개혁신학의 인식론적 전제는 성경이다. 성경적 명제를 은혜로 주어지는 계시로 인식하는 것이 개혁신학의 인식론적 전제인 것이다. 그리고, 도구로서의 이성의 쓰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성이 사유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원리로서의 이성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신학에서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서만 알 수 있고 예수는 성경을 통해서만 알 수 있으며, 성경은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2-3-2. 개혁주의 인식론적 전제인 성경이 참인 증거
첫째로는 벨하우젠은 ‘비교종교적인 접근방법’을 통해 성경이 참임을 증명하려 했다. 그러나 비교라는 말 자체가 상대주의를 전제한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참되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접근방법은 잘못된 것이다.
둘째로 논리적 증거로 규명하는 ‘변증학적 접근방법’과 경험적 증거로 규명하는 ‘험증학적 접근방법’을 통해 성경의 진리성을 증명하려 했다. 성경이 변증과 험증을 쓰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피조물이 하나님을 인식함에 있어 변증적, 험증적 방법은 불가능하다. 중세 스콜라주의자들은 변증학을 통해, 권위 있는 자의 논거를 진리로 받아들이게 해서 개종시키자는 뜻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잘못이다. 왜냐하면 이런 방법은 핑계하지 못하도록 입을 잠시 막는 일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로 ‘성령의 내적인 증언 방법(testimonium Spirituo Sancti internum)’이다. 이 방법은 헨리 미터의 책 [칼빈의 기본사상]에 나오는데 1884년 75명 집단개종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쪽복음을 통해 개종하고 세례 받았다. 이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 변증을 통해서였을까? 아니다. 참 신앙에 이른 사람이 자기 사상을 논증할 수는 있어도 변증은 참된 신앙에 이르게 할 수 없다. 그리고, 논증이 역사적 예수에 대한 믿음은 주어도 그리스도라는 믿음은 갖게 하지 못한다. 누구든지 성령의 증언이 아니면,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이 참인 증거는 성령의 내적조명을 받은 사람들 만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다섯째로 바빙크는 성경을 참으로 믿는 증거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라고 바빙크 조직신학 1권 634p에서 밝히고 있다. 그리고 왜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믿느냐고 질문한다면,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아무 답변도 할 수 없는 것이 정상이라고 말했다. 즉, 성경이 참인 것은 믿음의 차원이지 인식과 이해의 차원이 아니라는 뜻이다.
여섯 번째로 찰스 핫지는 바빙크와 다른 입장을 제시한다. 이성(Reason)은 계시(revelaion)가 믿을 만한지 판단해야 한는 것이다. 즉, 믿음 전에 신앙이 옳다는 근거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 구프린스턴학자들의 변증의 주장이다. 불신자들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중세 스콜라주의자들의 태도와 일맥상통한다. 이런 구프린스턴 학자들의 기독교 변증방법에 대해 로버트 L. 레이몬드는 그의 책 [개혁주의 변증학(85p)]에서 자세히 진술하고 있다. 구 프린스턴 신학자들은 헌신과 신앙에 앞서서 적절한 토대 위에 기독교 신앙 위한 타당성을 위한 근거를 세워서 불신자들이 받아 들일 수 있는 용어로 제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결론은 신앙은 성령이 주시는 내적인 증거인데, 구 프린스턴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성이 판별한 직관에만 의지하겠다는 뜻인 것이다. 이는 신학을 가능하게 하는 진리가 필연적 진리가 아닌 개연적 진리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개연적 진리란 이성을 거쳐 증명된 것이 진리라는 뜻이다. 이에 대해 레이몬드는 개연성 있는 증거들이 우리 신앙의 기준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반문한다. 레이몬드는 J.O.Buswell 조직신학 2권의 말을 인용한다. 신앙이란 주어진 계시 이상의 헌신 덧붙혀 지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성경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성경을 받아들이는 것 이상의 헌신(지적 열정...)이 포함되어야 참된 신앙이 생기게 된다고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레이몬드는 구프린스턴이 독일의 신신학에 대항해 기독교 핵심진리를 수호했기에 칭찬한다. 찰스핫지는 개혁주의 신학적 전통을 수호한 자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일반인들에게 신학을 변증하는 변증학 부분에서 문제를 지니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레이몬드는 요한복음 7:45을 근거로(아버지께로 듣고 배운) 신앙이란 자증하는 성경에서 배운 것에 대한 전 영혼의 동의라고 말한다. 이는 믿음 이전에 헌신이 포함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레이몬드는 J.I.Packer의 말을 인용한다. 패커는 개연성의 추론에 의해 진리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레이몬드는 다시 Clark Pinncck이 “개연성 있는 논증이 개연성 없는 논증보다 낫다”는 말을 들고 있다. 레이몬드는 벤틸의 글을 가지고 되받아 쳐서 말한다. 즉 개연적 진리 위에서 신앙이 나온다는 말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성경이 개연적 진리가 아닌, 자증적이라는 레이몬드의 주장은 성경, 칼빈 등이 말하고 있다. 웨신 1장(성경) 4-5절에도 성경의 신적 권위를 말하고 있다. 터툴리안은 “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라고 말했다는 것을 우리는 유념해 보아야 한다. 아버지의 뜻을 우리가 다 이해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2-4. 개혁신학의 인식론적 전제와 신앙생활
우리는 지금까지 개혁신학이란 무엇인지, 인식론적 전제란 무엇이고 인식론적 전제가 과연 존재하는지, 개혁신학의 인식론적 전제는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사상, 날마다 개혁되어야 한다는 개혁적 정신을 강조하는 개혁신학이 근거를 두고 있는 성경이 바로 개혁신학의 인식론적 전제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전제가 우리 삶 속에서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2-4-1 ‘도르트 신조’에 대한 확실한 고백
그 첫 번째는 개혁신학에서 포기할 수 없는 핵심교리를 모아놓은 도르트 신조에 대한 확실한 믿음의 고백이 선행되어져야 할 것이다. 도르트신조는 1618-1619년에 네덜란드에서 작성된 개혁주의 교리문서로서 알미니안들의 항론에 대한 변증적 차원의 결정문서이다. 이 회의에서 알미니안들의 항론과 반대되는 다섯가지 결정을 채택했는데, 그것은 ‘전적 부패’, ‘무조건적인 선택’, ‘제한속죄’, ‘불가항력적 은총’. ‘성도의 궁극적 견인’이다. 이것을 칼빈의 5대 강령이라고 한다. 이 칼빈의 5대강령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 어거스틴의 신학에, 바울의 신학에, 예수그리스도의 신학에 이어져 있는 가장 정통적이면서 바른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의 인식론적 전제가 성경이 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도르트 신조에 나타난 칼빈의 5대 강령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칼빈의 5대 강령을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 받아들이기에는 많은 장애물들이 있다는 것이다. 첫째로는 인권과의 충돌이다. 칼빈의 5대 강령은 휴머니즘, 인간존중이라는 21세기 최대 가치와 상충되는 내용들이 많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성과의 충돌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제한 속죄에 그친다는 말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는 교회현실과의 충돌이다. 무조건 선택, 성도의 궁극적 견인을 최대한 악용한다면 전도할 필요가 없어지기에 성도들에게 이를 설명하면서 전도를 동시에 말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신학의 인식론적 전제인 성경을 삶의 표준으로 삼고 살아가려면, 칼빈의 5대 강령을 확실히 고백해야 한다. 휴머니즘과 충돌되고, 이성과 충돌되고, 교회현실과 충돌되는 한이 있어도, 성경의 진리 중, 우리가 양보해서는 안 될 것들이 녹아져 있는 이 강령만큼은 믿음으로 고백해야 한다. 이 강령에 대해 의구심이 생기려 할 때, 우리는 레이몬드가 성경이 참인 증거로 든 신학자들의 언급을 기억하며 믿음으로 고백해야 할 것이다. 그러할 때, 우리의 신앙생활은 바르게 출발되어질 것이다.
2-4-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대한 교육과 실천
그렇다면 칼빈의 5대 강령을 믿음으로 고백한 후, 구체적인 성경에 나타나는 신앙생활의 실천적 요소들은 무엇을 통해 알고 실천해야 한단 말인가? 그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알고 실천할 때 가능할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1643-1647년 웨스트민스터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열린 종교회의에서 영국 국교회의 개혁을 주장하며 바른 교회와 바른 신앙을 세우기 위해서 작성한 총 33장의 신앙고백서이다. 이 신앙고백서는 성경에 입각해서 신앙을 정의해 나간 신앙문서이기에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것이다. 신앙고백서를 질문형식으로 만든 대요리문답과 소요리문답을 공부할 때, 우리는 성경을 전제한 삶의 구체적인 모양을 명확히 알게 된다. 그리고, 교회가, 구역원들이 서로서로 문답의 내용을 일주일동안 어떻게 실천했는지를 확인해 줄 때, 교회는, 성도는 비로소 성경을 삶의 전제로 삼는 개혁신학의 인식론적 전제 위에 가장 건강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2-4-3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삶
그러나 우리기 배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교리들이 위급한 상황이나, 분노의 상황에서는 쉽게 기억나지도, 실천할고자 하는 의지도 생기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개혁신의 인식론적 전제를 포기해야만 하는 걸까? 그렇다면 모든 영역에서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고자 노력하는 개혁주의 신학과는 맞지 않는 삶의 모습이 될 것이다. 그러할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분이 바로 말씀이요,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생각할 때, 우리 속의 복잡한 일들은 해결의 실마리를 보이게 되고, 분노했던 우리의 마음은 조금씩 차분해 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개혁신학의 인식론적 전제인 말씀의 바탕 위에 살기를 힘쓰는 우리 영혼에 가장 좋은 구급약이 된다.
3. 맺음말
우리는 지금까지 개혁신학의 인식론적 전제가 성경이라는 것을 증명해 내었고, 성경을 전제로 하여 신앙생활 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노력들에는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현상에 현혹되지 않고, 바른 전제의 닻을 항상 내리고 있을 때 우리는 주님 오실 때 까지 부끄럽지 않은 신앙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고, 우리 후세대 들에게 바른 신앙의 유산을 물려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그것은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자체를 즐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 차려진 밥상 위에 숟가락만 올려 놓으려 하는 마음에, 전제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에 맞고 느낌이 좋으면 그저 수용하고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개혁신학의 인식론적 전제를 가르치기 이전에 성도들에게 생각하는 습관을 길러줄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생각하는 습관의 바탕 위에, 바른 개혁신학의 인식론적 전제인 성경을 가르칠 때, 바른 성도의 모습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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