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설교] 종의 멍애

주전담백 主前淡白 2005. 5. 10. 17:00

 

 

 

 

 

다시는 종의 멍애를 매지 말자

 

  - 갈라디아서 1장 1절-10절

 

1. 도입

1) 갈라디아서 개관
  갈라디아서는 27권의 신약성경 중, 9번째이고, 서신서 중에서는 4번째 서신서로 바울이 갈라디아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갈라디아서의 주제는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한다.”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서 갈라디아서를 [자유대헌장]이라고 부르기까지 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자”도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2) 갈라디아서 특징
갈라디아서의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 믿음으로 교회를 세웠지만 할례와 율법과 같은 다른 복음에 흔들리고 있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꾸짖는 내용이고, 꾸짖어 잘못을 교정하기 위해 썼기 때문에 매우 전투적인 내용의 서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서신을 강해설교의 본문으로 선택하게 된 것도,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을 돌이키기 위해서는 사랑과 권고의 말 보다는 꾸짖고, 훈련시키는 내용이 필요하겠다 싶어서 이 내용을 선택했습니다.

 

 

3) 갈라디아서 구조
갈라디아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는데, 교리문제를 다룬 1-4장과 윤리문제를 다룬 5-6장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

 

1) 주 예수를 쫓으면 은혜와 평강이 임한다. (3절)

일주일간 본문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대학청년부에 던져주셔서 받은 제가 받은 말씀은 두가지입니다.

그 첫 번째가 3절 말씀입니다. 이 3절 말씀의 중심 단어는 “쫓다” “은혜” “평강”입니다. 먼저 “은혜”란 단어의 원 헬라어는 “카리스”로 자세히 설명하면 ‘친절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평강”은 원어로 “에이레네”로 풀어 설명하면 ‘전쟁이 없는 편안한 안식의 상태’를 말한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쫓는다”는 것은 ‘발걸음을 놓칠세라 급하게 한걸음 한걸음 따른다’는 의미가 있스습니다.

오늘 이 구절에서 우리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때 기억해야 할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발걸음 한걸음 한걸음을 놓칠세라 집중하며 쫓을 때, 이것이 내가 하는 일과 전혀 상관없을 것 같지만, 사실은 주님께서 우리를 친절하게 지도해 주시고(카리스), 마음에 평안을 주신다는 것입니다.(에이레네) 지금까지 여러분은 자신의 방법과 생각의 걸음에 맞춰 세상을 살 뿐만 아니라 그 방법을 그대로 교회일에도 적용해 오지 않았습니까? 세상에서는 합리성으로만 돌아간다 할 지라도, 교회는 합리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한 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열심히 봉사하고 수고하지만 친절한 안내와 평안을 경험하지 못하고 봉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게 된 이유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해 보지는 않았습니까?

진정한 자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진정한 자유란 [참된 지도자를 만나는 것]입니다. 컵은 비워 둘 수 없습니다. 비워 두면 먼지만 끼게 마련이죠. 무엇이든 자주 담고 사용해야 하는 것이 컵인 것입니다. 하지만, 바르게 사용하고 바른 내용물을 담는 사람을 만날 때 비로소 친절하게 사용되고 편안한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하지만, 바르지 못한 사용자를 만나면 험하게 쓰이고 아무거나 담기다가 결국 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진실로 예수를 쫓고 있습니까? 그분의 발걸음 한걸음 한걸음을 놓칠세라 집중하여 따르려 하십니까? 아침을 말씀과 기도로 시작해 보십시오. 친절하시고, 평안의 근원 되신 주님께서 여러분을 적절하게 안내하실 것입니다.

 

 

2) 예수께서는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기 위해 자기 몸을 드렸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두 번째 음성은 4절 말씀입니다.

현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 중에 하나는 “배신자”일 것입니다. 현대인의 고정관념 중 하나가 “Give and take"인데, 그 관념 속에서 자신이 준 만큼 주지 않을 때, 기대한 것을 행하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흔히 ‘배신자’라고 합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바로 그 배신자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주시었는데, 악한 세대에서 건지기 위해 자기 몸을 드리셨는데, 우리는 은연 중에 주님이 주시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우리가 주는 것은 고려해야 할 사항이라고 결정내리고 있습니다.

이 내용과 관련해서, 우리가 마귀에게 잘 속는 것 중의 하나가 섭섭함입니다. “내가 이만큼 했는데, 왜 너는 하지 않느냐?”는 식의 생각이 은연중에 들어와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되고, 그 미움은 커져만 가서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일으키기도 하고, 심지어는 교회를 분열시키는 최초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든 크리스찬들이 4절의 말씀을 기억한다면 이는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삼단논법]으로 설명해 보죠. 우리는 몸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사랑을 받았고, 지금도 중보하시는 주님을 통해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 사랑과 베풂을 통해서도 주님의 그 사랑에 근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사람이 무엇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섭섭해 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이 주신 이성으로 바르게 판단하면 시험들 일이 없는데, 우리는 감정과 성급함에 이끌려 잘못된 판단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따라야 하는 그 분은 이처럼 우리에게 위대한 일을 행하신 분이십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도,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죄를 위해 몸을 주신 하나님이 너무 고마워 눈물과 희생으로 주님을 섬기고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과 그 사랑과 희생에 무감각하여 자기 것만 고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이 느끼는 하나님이 동일에게 내게도 느껴지는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하나님은 그 사람의 하나님이고 나의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머리 속에 그리고 있는 하나님이 다른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지 못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죽었다, 혹은 하나님이 나를 버렸다라고 오해하며 억지로 억지로 신앙생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도 내가 이름을 부르고 의미를 부여할 때, 나의 머리에 기억되고, 인식되고 활용되듯이, 하나님도 신앙 안에서 체험하고 그분께 순종하여 복을 받은 경험을 간직할 때, 진실로 능력의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당신이 만나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당신이 만나는 주님은 실제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이십니까? 아니면, 그냥 지식으로만 알고 있는 주님이십니까? 진실로 나를 위해 목숨을 주신 주님을 만나고 신뢰하고 따라서 작은 승리의 경험들을 만들어 갈 때 우리는 진실로 자유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3. 맺는 말

앞으로 우리는 14주 동안 갈라디아서를 살피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알아갈 것입니다. 사전을 살펴보니 자유에 대해 아주 상반되는 의미 두가지가 나오더군요. 첫 번째는 ‘얽매이지 않고, 마음대로 행하는 것’을 자유라고 하는 가 하면 ‘법률 안에서 마음대로 행하는 것’을 자유라고 했습니다. 어쩜 첫 번째 정의는 [방종]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을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에서 정의하고 있는 자유의 뜻에도 법률이라는 기준에 의거한 삶 속에서 발견하는 자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자유함이 없다라고 속고 있지는 않습니까? 토요일 주일을 교회에 매여 사는 것이, 술도 담배도, 세상의 즐거움도 마음 껏 누리지 못하는 것이 무슨 자유냐고 반문하시는 분은 없습니까? 만약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그분은 자유가 아닌 [방종]을 원하시는 분입니다. 방종의 종착점은 파멸이라는 것을 다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차에 브레이크가 있어야 빨리 달릴 것 같습니까? 브레이크가 없어야 빨리 달릴 것 같습니까? 역설적이게도 브레이크가 있어야 빨리 달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자유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를 얽어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우리를 더 자유롭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지요.

14주의 긴 여정을 떠나면서 그리스도를 쫓을 때 은혜와 평강이 임한다는 대 명제를 여러분께 제시했습니다. 그리스도만 따라야 겠다는 이 대 명제에 이제는 동의하시겠습니까? 그럼 자유라는 문턱에 절반은 도달하신 것입니다. 더 자세히 가르쳐 달라구요? 서둘지 마시고, 차차 알아가길 원합니다. 그리고, 그 해답은 매일 아침마다 묵상하는 성경에 있다는 것을 미리 귓뜸 해 드립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 이것은 환상이거나 자기 합리화가 아닙니다. 실제하는 것입니다. 느끼는 사람만 알 수 있는 실제. 여러분도 이 실제에 동참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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