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스테레오 타입 [stereotype]
스테레오타입이란 우리말로 고정관념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뚜렷한 근거가 없이 여러 방향에서 밀려오는, 감정적인 판단과 타인의 생각에 맞춰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스스로 사물을 지각하는 능력이 부족해서이거나, 불합리하다고 판단해도 세상 질서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2. 우리에게 주어진 세 가지 스테레오 타입
1) 넌 변하지 않아. (패배주의)
우리는 "누구"하면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기 보다 그 사람의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잘 생긴 사람도 나쁜 기억으로 남기도 하지만, 아무리 못생기고 뚱뚱한 사람도 그의 좋은 이미지로 인해 나쁜 모든 부분들이 상쇄되어 버리죠. 연애의 기본도 이와 같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마귀하면 영화의 무서운 얼굴들을 떠올리기 쉬운데, 이는 세상문화를 조종하는 마귀의 계략에 불과합니다. 그럼 마귀하면 무슨 이미지가 떠오릅니까? 바로 "속이는 영"이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여러 가지 말로, 우리를 속입니다. '나중에 해' '다 하는 거니까 괜찮아' '저 사람 너무 꼴불견이야' 등등의 말로 우리를 속입니다. 그 중 가장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말은 '봐∼ 넌 별 수 없어. 변할 수 없어'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이미 마귀를 이기셨는데도 불구하고, 큰 기둥에 매달린 체 으르렁 거리는 개를 보고 질겁을 하는 어린아이처럼, 우리는 마귀에게 속아서 '맞아. 난 변할 수 없어, 그러니 그냥 적당히 살다가 천국가자.'라고 속아버리게 됩니다. 이것은 먹을 것이 조금 밖에 없어 굶주리는 사람 보다, 먹을 것이 눈 앞에 있는데, 질병으로 환경적으로 먹을 수 없는 사람이 느끼는 고난처럼, 우리를 더 힘들게 하고 자유하지 못하게 하는 스테레오타입 입니다.
2) 세상과 교회는 달라 (이원론)
어떤 교회 당회에서 목사님이 어떤 사안에 대해 의견을 내었을 때 한 장로님께서 "목사님, 교회일 하고 세상 일 하고 같은 줄 아십니까? 그렇게 하면 될 일도 안됩니다. 제 경험에 이러하니 이렇게 합시다."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결국에 그 장로님 의견대로 해서 결국 되긴 되었지만 아주 힘들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시작된 이원론은 성스러운 직업과 세속적인 직업을 구분했던 초대교회 지도자들로 이어져 뿌리깊게 기독교 사회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이 내 부활은 아니고, 예수님의 성화가 내 성화는 아니며, 세상에서의 삶이 신앙 속의 내 삶은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러한 이원론은 전쟁을 위해 준비된 용사를 마당이나 쓸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결과를 낳게 되게 된 것입니다. 결국 그 용사는 모든 힘과 용기를 잃고 자신의 본분을 잃어버리게 되듯이,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원론적 사고에 빠져서 세상 속에서 해야 하는 하나님의 사명을 망각하게 되어 버렸고, 결국에 세상은 마귀의 손아귀에 있고, 구원받을 백성들은 계속 신음하고 있고, 뭔가 잘못 되어가는 것은 알겠지만, 스테레오 타입에 빠진 우리들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 체 괴로워 하면 세상에 끌려 가고 있는 것입니다.
3) 나부터 살고 보자. (개인주의)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집사의 책무는 "자비량 구제"였습니다. 당시 히브리파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가족과 직장과 공동체와의 단절이라는 큰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구제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구제해야 할 사람과 정도와 방법을 지혜롭게 잘 헤아려 시행해야 할 사람이 필요했고 그래서 시작된 것이 집사제도입니다. 이처럼 기독교의 정신에서 "이타주의" "공동체 정신"이 빠지고 나면 나라없는 대통령과 같은 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 속에 팽배해져 있는 모습이 이런 개인주의입니다. 자신의 삶에서 적당한 선을 긋고 이 정도 까지는 교회를 위해 해 준다고 큰 인심 쓰듯이 결정하고, 그 이상이 교회에서 필요할 때는 단호이 거절합니다. 이런 현상은 젊은 세대에게 두드러져서 자신들은 누군가의 신앙훈련봉사와 헌신 속에서 자라 왔지만 막상 교회를 위해 봉사할 나이가 되었을 때 이들은 과거를 망각한 채 자신의 즐거움을 찾아 나아갑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개인주의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것이 고쳐지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이미 세상속에 팽배해져 있는 [개인주의]라는 스테레오 타입에 은연중에 물들어 있고,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인식이 없는 상태에서 교회를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교회 내에 아주 기형적인 현상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교회 내에서 겉으로 볼 때는 분명히 신실한 사람이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같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종인데, 그 교회에 하나님의 역사가 임하지 않는, 아주 기형적인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잘못 되었거나, 그 사람이 잘못되었기 때문이지 결코 정상적인 현상은 아닙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걸까요? 그것은 스테레오 타입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은 사람이, 형식적으로 자신의 개인주의를 포기하고 교회에 헌신하지만, 결국 그 헌신이 자신의 세상 욕심의 일환으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세상적인 큰 욕망을 이루기 위해, 영적인 작은 욕망을 이용해 먹고 있는 것입니다. 결혼을 위해 교회에 나오고, 사람들의 인정을 위해 교회에 나오고, 내 체면과 습관을 쫓아 교회에 나오기 때문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이고, 이것이 교회 내에서 또 하나의 [스테레오 타입]을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다가는 2차세계대전 후, 하나님은 죽었다고 외치며 탄생한 독일의 [사신(死神)신학]이 우리에게도 나타나지 말라는 법이 있겠습니까?
3. 기독교는 역설(paradox)의 종교
오늘 읽은 마태복음 16장 25절 말씀에서 우리는, 기독교가 '역설'의 종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이 말씀 그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스스로 살길과 변화의 방법을 모색하지만 그렇게 뾰족한 해답을 내린 사람은 많이 없습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는 손이 두 개입니다. 그러므로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두 손에 쥘 수 있는 양은 한계가 있습니다. 돌을 쥐고 있는 두 손에 눈 앞에 있는 두 개의 금덩이를 쥐고 싶다면 돌을 내려 놓고, 쥐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한 손의 돌을 놓고, 금을 쥐는 대는 성공하였지만 다른 한 손의 돌은 놓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손에 돈을 들고, 영화관으로 향해서 한 손의 돈으로 영화표를 샀지만 한손의 돈으로 팝콘과 콜라를 사지 않으면, 돈은 들고 있지만 팝콘과 콜라는 먹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스테레오타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4. 스테레오 타입을 극복하는 방법
1) 기본으로 돌아가라.
운동선수들이 슬럼프에 빠지게 되면, 자신의 초창기나 전성기 때 모습이 담긴 비디오를 보면서 벗어난다고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겠지요. 기본으로 돌아가기 바랍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고 구주로 영접하고, 기뻐했던 기본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나와 내 문제가 해결되었던 그때의 기본,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를 가슴 깊이 새기며 예수님을 내 주인으로 모시겠다고 다짐한 그 기본, 그분을 섬길 때 정말 정말 기뻤던 그 기본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또한 기독교 생활의 기본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독교의 5대 활동은 "예배, 전도, 양육, 교제, 구제"입니다. 이 활동이 바르게 이어지는지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말씀과 기도로 사는지, 예배를 정성로 드리는지 등등 이 활동에 자신을 비춰 보아 1.2가지 정도는 바르게 생활 할 수 있게 되어야 합니다.
2) 바른 곳에 반응하라
먼저 바른 곳에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유혹과 죄된 본성에 반응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이 있는 곳에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험담하는 곳, 세상의 즐거움이 있는 대화의 장소, 돈 버는 이야기, 시험 족보가 떠도는 곳에 우리의 관심과 반응을 보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열감지 센서가 장착된 엘리베이터 처럼, 맨손으로 누르면 원하는 곳으로 가지만, 장갑을 끼거나 해서 조건에 맞지 않으면 아무 반응도 하지 않는 상황을 닮기 바랍니다. 아무리 자신의 말로 많은 내용을 입력해도 "not found"라고만 말하는 DOS 운영체제의 컴퓨터 처럼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죄에 대한 유혹이 오면 자리를 피하거나, 기도하거나, 최소한 동의는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대한 자극이 오면 즉각적으로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5. 스스로 돌이키지 않으면......
사형직전에 있는 죄수나, 엄청난 사고나 질병으로 장애를 가진 사람을 보면 극단적으로 구분되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속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스테레오 타입을 바꾼 사람은 죽음에도 질병에도 기뻐하고 감사하지만, 예수를 믿지 않거나, 믿어도 세상의 스테레오 타입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죽음과 질병을 원망하게 됩니다.
죽임을 당하고 질병은 얻은 그 사람들이, 사실 감사할 것이 뭐가 있겠냐고 말한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저 자신의 신세를 합리화하는 것이라고 말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래도 낳습니다. 그렇게 되어서라도 바른 길을 찾았으니까요. 하지만 가장 불행한 사람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사람일 것입니다.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잘못을 해도, 고치지 않았는데도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까? 그것이 혹시 하나님께서 버리셨다는 뜻은 아닐런지요. 더 늦기 전에, 기회가 있을 때 돌이킵시다. 지켜봐 주고, 지도해주고, 조언해 줄 수 있을 때 돌이킵시다. 주님은 언제나 받아줄 마음을 가진 분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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