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당당함
▪본문 : 요한복음 8장
1. 도입 : 四面楚歌
중국 고사성어에 “사면초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진나라 말기, 혼란한 시기를 틈타, 권력을 잡으려 했던 서초패왕 [항우]와 한왕 [유방]의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힘만 믿고 연전 연승하던 항우는 유방의 계략에 점점 밀리게 됩니다. 그러다 안휘성 부근에서 항우의 초나라 군사가 포위당하게 되는데, 한나라 군사들이 초나라의 노래를 배워 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 중국의 방언은 우리나라 방언과는 다르게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정도로 다른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나라 진영에서 초나라 소리가 들리자 초나라 병사들은 초나라가 이미 한나라의 손에 들어간 것으로 오해하게 되었습니다. 고도의 심리전에 말려든 셈이죠.
당시, 항우의 병사들은 귀족출신이기 때문에 험한 일에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계속되는 전투와 험한 생활 속에서 지쳐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작은 상황변화에도 쉽게 낙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전투력을 상실한 초나라 군사들은 한나라 군사들에게 몰살당하고 겨우 탈출한 항우는 끝내 자결하게 됩니다.
사면초가는 중국의 고사성어 입니다. 이 고사성어는 직면한 어려움만을 나타낼 뿐, 그 다음 단계는 소개하고 있지 않습니다. 쉽게 말하면 매우 비관적인 말이라는 뜻이지요. 하지만 우리 속담 중에 이 말과 같은 상황이지만 매우 긍정적인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호랑이 굴에 빠져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라는 말입니다. 워낙 고난에 많이 처해본 민족이기 때문이겠죠.
오늘 예수님은 사면초가의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하지만, 항우처럼 속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속담처럼 솟아날 구멍을 찾으셨고, 정신을 바짝 차리셨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 고도의 심리전에 승리하시고, 당당히 진리를 선포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전히 죽음의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래도 당당히 진리를 선포하십니다. 밀려오는 거대한 파도 앞에 있는 조각배와 같은 상황이지만 차분하면서도 당당히 승리하십니다. 이 승리의 원천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 당당함을 닮을 수 없는 것일까요? 어떻게 하면 닮을 수 있을지 묵상해 보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2. 전개
1) 본문해설
(1)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신 예수님
예수님은 7장에서 명절 끝날까지 죽을 각오를 하고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머물게 방을 내어준 사람은 없었나 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근처 감람산에 가셔서 밤을 보내십니다. 아마도 철야로 기도하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아마도 다음 날 있을 엄청난 전쟁을 예감하신 듯, 영적인 힘을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기 위해서였을거라 생각됩니다.
피곤도 하셨을텐데 아침 일찍 다시 성전 안으로 들어가십니다.(2절) 그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예수님을 난처한 상황에 빠뜨립니다. 유대인 무리들은 간음한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잡아 예수님 발 앞에 던집니다. 그 여인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데려 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난처하게 하려고 한 것이라는 것을 요한도 알고 있었습니다.(6절) 아마도 이 여인은 음행을 일삼는 여인으로, 정치인들의 흠을 잡고 있다가 선거때 폭로하듯이, 예수님을 위험에 빠뜨릴 지금 그 여인을 데려 온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아주 당당하고 합리적으로 질문합니다. “모세의 율법에 간음한 여인은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할까요?”(5절) 그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땅에 앉아 무슨 글씨를 쓰십니다. 어떤 글을 쓰셨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예수님은 그 사람들의 조급함에 찬물을 끼언듯이 시간을 두는 것 뿐 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에 승리를 예감하고 조급해진 유대인들은 대답을 종용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낮은 목소리로 “너희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7절) 이 말 한마디에 모든 사람은 한마디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유식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더 했었습니다. 신명기 17:7에 보면 “증인이 먼저 손을 대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모인 그 누구도 죄에서 자유한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자를 죽여 증인으로 나서기를 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통쾌한 장면입니까? 지금 예수님은 단 한방에, 그들이 시비 걸어 온 방법 그대로 그들에게 되값아 주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걸어온 고도의 심리전에 대해, 더 높은 차원의 심리전으로 대응하셔서 승리하신 것입니다.
결국 서기관과 바리새인 무리들은 다 꽁무니를 빼고 말았습니다.(10절) 그리고, 정작 죄 없으신 예수님, 정죄하실 수 있는 예수님은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교훈과 함께 그 여인을 놓아 줍니다. 아마도, 그 여인은 간음하다 잡힌 것에 대해 엄청 재수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이 이렇게 잡혀 예수님께 나오지 않았다면 그 간음죄를 평생 떨쳐 버릴 수 없었을 것이고, 평생 남자의 노리게로 전락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 여인은 이 죽을 위기의 상황에서 예수님을 만남으로 새 삶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녀에게 용서를 베푸신 예수님은, 이 일을 계기로 또 다른 죽음의 위기에 직면하시게 됩니다.
(2) 바리새인들과의 논쟁 1라운드
많은 설교가들은 요한복음 8:1-11과 12-59절을 나눠 설교합니다. 그 이유는 본문이 너무 길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설교는 예수님의 의도를 잘못 전달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베푸시는 목적은 기적으로 인해 몰려 든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하고 천국을 전파하기 위해서인데, 기적 부분만을 설교하면 예수님이 말씀하고 싶은 것은 뭍혀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8장 전체를 가지고 예수님의 뜻을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예수님은 아주 여유 있고 당당하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계략에서 승리하십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분을 풀기 위해 또 다른 바리새인들과 무리들이 다가 옵니다. -전에 여호와 증인과의 대화 이야기- 이미 대화로는 예수님을 이길 수 없었는지 바리새인들은 그냥 예수님께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예수님이 먼저 말을 꺼내십니다.
유대인 질문 | 예수님 대답 |
| 나는 세상의 빛이다(12) |
자기가 자기를 증거하는 것이 옳으냐? |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다 하셨다(16) |
|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못 올것이다(21) |
저가 자살하려 가려는가? | 내가 가는 곳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
네가 누구냐? | 처음부터 말한자이다 (하나님이다) |
사람들이 믿더라 (30) |
|
세 번의 주고받은 대화 속에서 예수님은 한마디도 지지 않고 그들에게 당당히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제 예수님께 질문하기는 커녕, 말씀에 대한 반박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이정도면 되지 않았을 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3) 바리새인과의 논쟁 2라운드
지금 분명 예수님은 승리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인정도 받았습니다. 그들을 굴복시키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하고 싶은 말은 아직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믿으려하는 그들에게 그들에게 거슬리는 말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영혼을 위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될 것이다.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31-32절) 많은 사람들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말만 뽑아서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이 글은 전체 문장의 중간부분일 뿐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 중에서, 정말 당당하고 순교할 각오로 살고 싶은 사람에게 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을 믿으려 한 자들은 기분이 상했습니다.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자기들이 과거에 종이었다고 했기 때문이고, 예수님이 아브라함을 보았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의도는 육체적인 종이 아닌, 영적인 죄의 종이었음을 이야기 하셨고, 태초부터 계셨으므로 아브라함을 보았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믿으려 했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완전히 믿지도 완전한 제자도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 감정적으로 대응합니다. 그래서 결국 돌을 들어 예수님을 쳐 죽이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자리를 빠져 나가십니다.
2) 받은 은혜
(1) 여러분은 당당하십니까?
사랑하는 대학 청년부 여러분! 우리나라 속담에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의 잘못을 은폐하기 위해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접근이 아닌 감정적인 접근을 하는 사람을 비꼬는 말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된 유대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간음한 여인을 끌고 와서 예수님을 사면초가에 빠뜨렸다고 생각한 유대인들의 당당함이 점점 변하여, 돌을 들어 칠 정도로 폭력적인 자세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대학 청년부 여러분! 여러분들은 당당하십니까? 어디서나 당당하십니까? 우리 예수님처럼 어떤 위협적인 상황 속에서도 느긋하고 당당하실 수 있으십니까? 교회에서는 말씀대로 당당하게 살 것 같은데, 세상에만 나가면 세상사람들이 옳아 보이고, 나는 괜실히 손해만 볼 것 같아 비굴해 지고 예수님을 배반하지는 않으십니까? 왜 그럴까요? 왜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당당하지 못할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의 바른 제자가 되지 못하였고, 제자로서 진리를 알아야 자유하게 되는데 진리를 바르게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진리를 발견하셨습니까?
마태복음 13장의 말씀처럼 진리는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죠.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지만 진리를 볼 수 있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여 당당한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복음과 같은 진리를 말씀하실 때면 언제나 비유로 말씀하시고 제자들에게만 풀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우리들이 진리를 바로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제자란 무엇입니까? 나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의지대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중국 무협영화를 보십시요, 제자가 익숙했던 방법들을 떠날 때에, 스승은 비로소 제자에게 비법을 전수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자신의 생각과 습관과 꿈을 모두 내려놓고 스승이 시키는데로 하는 사람이 제자인 것입니다. 그 결과 그 제자는, 그 동안 얻지 못했던 힘과 능력과 지혜를 얻어, 전혀 다른 삶, 그 스승과 같은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제자로써 누리는 것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을 뿐, 자신을 버려야 하는 것에는 소극적인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믿으려 했던 유대인들이 그 증거입니다. 그들은 빛 되신 예수님을 믿어 바른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을 모욕하는 말을 듣고서는 마음이 상해서 도리어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리를 깨달아 보화를 얻기는 커녕, 씻을 수 없는 죄인의 길에 들어설 뻔한 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 8장의 주인공은, 용서받은 간음한 여인이 아닙니다. 예수님 앞에서 당당하지 못했던 유대인들과, 믿으려 하다가 실패하고만 그 유대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도요한은 그들의 모습을 통해, 완전히 변화되지 못하고 머뭇머뭇 거리고 있는 우리에게 경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3) 진정 변화된 제자입니까?
당신은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진정 변화된 제자입니까? 진리를 깨달은 자입니까? 삶의 모든 부분과 모든 영역에서 당당하신 분들입니까? 이런 삶을 살고 싶기는 한 것입니까?
사랑하는 대학청년부 여러분! 수영을 어줍잖케 배워서 수영장에 가면 괜히 힘만 들고, 수영은 하기 싫고 괜히 다른데만 쳐다보게 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지요. 믿음이 아예 없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어 가야 신앙생활 할 맛이 있지, 변화되지 못하고 계속 제자리 걸음만 한다면 신앙생활 하기도 싫을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되어야 할까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제자가 되기 위해 자신의 생각, 습관, 꿈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방법은 누가 가르쳐 줍니까? 1차로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만날 때 간음한 여인도 용서해 주시는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그리고 누가 도와 줍니까? 2차로 여러분의 앞에 있는 저와 조장들이 여러분들을 도와 줄 것입니다.
부지런히 말씀을 읽고 기도하여서 모든 상황을 영적으로 해석해 봅시다. 예전보다 더 느긋하고 당당하게 될 것입니다. [죽음의 두려움]도 영생의 소망으로 바뀌게 되고, [물질의 압박]도 모든 물질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이길 수 있게 됩니다. [외모의 압박]도 중심을 보시는 주님과 진정한 마음을 보는 상대를 만나게 됨으로 이길 수 있게 되고, [권력으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도, 행동과 모범으로 인정하는 주님과 사람들을 통해 이겨낼 수 있습니다. 마음 속에 말씀을 가득히 채우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면 우리는 진정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알게 되고, 자유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전 눈길 운전을 해본 경험이 없습니다. 그 때는 당황스럽기 그지 없었습니다. 하지만 눈길 운전을 해본 경험이 있는 지금에는, 어떻게 해야 할 줄을 알기 때문에 느긋하고 평안하며 당당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 리더캠프 때 그 경험을 했습니다. 제자가 되어 진리를 알면 삶에 평안이 생기게 됩니다. 기쁨이 생기게 됩니다. 자유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삶! 누리고 싶지 않으십니까? 자신을 조금만 희생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변화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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