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설교문] 확신, 헌신, 그리고 사랑

주전담백 主前淡白 2005. 9. 18. 06:29

 

 

 

확신과 헌신. 그리고 사랑

갈라디아서 4:8-20

<도입>


지난 주에 우리는 우리의 낮아진 자존감을 회복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저를 통해 들었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감사하고 자랑할 때 우리의 자존감은 회복된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만 가지고 회복한 자존감은 공상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가질 만한 근거를 가져야 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과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이을 자가 되었다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의 보살피심과 고통과 수고가 없는 천국의 삶을 우리에게 유업으로 주셨음을 생각할 때 우리는 더 이상 마귀의 자녀들에게 꿇리지 않고, 비록 세상적 기준으로 보면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가치 있고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했고 이 생각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말씀과 기도임을 강조했습니다.

이런 깨달음을 얻어 자유의 길에 한발짝 다가선 우리에게 있어 주의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얻은 자존감에 대한 확신을 어떻게 유지하며, 혼자가 아닌 함께 해야 함에 대해 나눠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 자유에 대한 확신(9절)

9절 말씀에 ‘우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이 우리를 아신 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8절 말씀에도 ‘너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에서도 ‘알다’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원어를 살펴보면 8절과 9절의 ‘알다’라는 단어가 다른 단어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8절의 ‘알다’는 eijdw(에이도)로 ‘알다, 보다’라는 의미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9절의 ‘알다’는 ginwvskw (기노스코) 인데, 이 단어는 ‘알다, 보다’라는 의미 뿐 아니라. ‘부부가 서로를 아는 정도로 잘 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전에 여러분들은 주님을 알지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존재였습니다. 아니 죄 많은 우리의 힘으로는, 종의 신분이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로서는 주님을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100년이라는 짧은 인생을 내 맘대로 살다가 영원히 자유를 잃어버려야만 하는 지옥으로 가게 된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셨던 하나님께서는 독생하신 아들을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혀 보내시고, 우리 죄를 대표해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믿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쉽게 배반하는 우리를 강압적으로 죄수를 호송하듯이 천국으로 인도하실 수도 있었는데, 단지 우리를 알게 만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안다는 것이 세상사람들이 지식적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닌 , 부부가 서로의 신체, 인격, 습관까지 알 듯이 가까이 알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자~ 여러분 그분의 사랑이 어떠합니까? 너무 크고 대단하지 않습니까? 내가 크게 투자한 사업이라면 반드시 성공시키기 위해 강압적인 방법을 쓸 만도 한데, 우리 주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시면서, 우리가 주님을 바르게 알고 우리 스스로가 주님을 따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런 주님을 뒤로하고 갈라디아 교인들은 다시 악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바울은 호통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을 깊이 만나셨습니까? 부부라고 하면 실감이 안 날테고, 가장 친한 친구나 연인과의 관계와 여러분과 주님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주님이 느껴지십니까? 주님을 매일 매일 만나십니까? 그분의 마음을 매번 느끼십니까? 과거에 느꼈던 주님이 이제는 기억 저편으로 가물가물해져 버리지만은 않았습니까?


2. 느리더라도 확신 있고 착실하게

새벽기도를 다녀와서 다시 누우면 피로가 풀릴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몸의 장기 중에서 가장 늦게 깨어나는 장기가 이라고 합니다. 간이 이제 활동하려고 기름을 치면서 움직이는데, 갑자기 한시간 이상의 잠으로 활동을 멈추게 되면 몸에 큰 무리가 온다고 합니다. 마치 왕성하게 움직이는 엔진을 갑자기 끄듯이 말이죠. 그렇게 되면 간에 쳐진 기름이 그대로 굳게 된다고 하네요. 그래서 만성 피로에 시달리게 되고 젊은 목사님들이 간경화로 돌연사 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합니다.

이제 막 확신을 가지고 주님을 위해 살려고 하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현실의 벽과 친한 사람들의 핀잔, 가족들의 핍박입니다. 그런 벽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면서 우린 좌절하고 쉽게 포기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시작하지 않는 것이, 아주 작은 부분부터 시작하는 것이 현명한 것입니다.

사지가 멀쩡한 노숙자들이 일은 하지 않고 자존심을 구겨 가면서 구걸하고 길거리에 자는 이유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그들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실패의 경험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큰 충격을 겪고 나면 만사가 귀찮게 여겨지는 경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시험을 망쳤다거나 연인과 헤어졌다거나 직장에서 일을 그르쳤을 때 몇일을 침상에서 헤매곤 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부분부터 성공해 나가야 합니다. 서서히 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조금 많이 알게 되었다고 해서 큰 일에 도전하다가는 굳어버린 간 처럼 다시는 쓸 수 없는 신앙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작은 일이라도 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3. 헌신과 사랑 

하지만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몰랐을까요? 하나님과 맺었던 친숙한 앎의 관계를 유지하고픈 마음을 갖지 않고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인생의 어느 순간 보다 가치있고 기쁜 경험을 했고 그 경험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나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같은 뜻을 품고, 서로를 격려하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을 유지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독처하는 것이 안쓰러워보여 하와를 만들어 최초의 교회인 가정을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말씀하시고 구원을 이뤄가시며,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신앙 좋은 사람이라도 교회를 떠나서는 상급은커녕 천국도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들이 모이기는 모이지만, 한 지붕 아래 있지만 각자의 상자안에 갖혀 있는 닭처럼 따로 따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13, 14절 말씀에서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업신여기지 않고 버리지 않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눈이라도 빼어주고, 해산의 수고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각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구원의 확신과 삶의 자유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함께 모여 서로를 돕고 위로하는 공동체적 삶이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동체의 필수조건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 첫 번째는 뭐니뭐니 해도, [애정]일 것입니다. 오고가는 사랑이 있다는 것이 바로 공동체의 시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칼빈은 ‘개도 주인을 위해 짓는데, 형제와 주를 모욕하는 자를 가만히 둘 것인가’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서로를 향해 형제, 자매라고 부르면서 우리는 얼마나 애정을 갖고 서로를 대합니까? 서로의 형편을 묻고, 함께 있어주고, 내가 할 수 있는 한의 도움도 주는 모습, 이것이 공동체의 기본일 것입니다.

둘째로 공동체는 19절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형상이 회복]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그 일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애정만 가지고, 머리만 키우는 성경공부만 가지고 있는 공동체는 건전한 공동체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공동체에 예수님의 뜻과 행동이 회복되도록 헌신하고 나누면서 해산의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서로를 높이고 즐거운 농담들과 칭찬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잘한 일이 있을 때는 아주 진지하게 칭찬을 해야겠지만, 잘못을 했을 때는 많은 기도를 바탕으로, 아주 적절한 방법으로 권면할 필요가 있습니다. 친한 사람일수록 작은 일에 야단치고 큰 일에 너그러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평소 작은 실수라도 큰 실수와 연결될 것 같을 때는 충고도 하고, 큰 잘못에 대해서는 큰 사랑으로 덮어줄 줄 아는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형상이 회복된 공동체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4. 나의 작은 헌신이 무슨....

우리는 가끔 푸념합니다. ‘나의 작은 헌신으로 우리 공동체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회복될까?’ 이런 생각에 우리는 하기도 전에 포기하고 자기 앞가름만 하고 욕 안먹을 만큼만 일하는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머리를 가지고 계획한 일은 그 만큼의 유익을 주긴 하지만 그 이상은 얻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더 큰 보물을 차는 결과를 맞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 주님이 12제자의 반복되는 배신을 바라보시면서 대충 가르치셨다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들어왔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무지하고 약하고 쉽게 포기하는 제자들과 함께한 공동체에서 솔선수범하여 희생하셨습니다. 그 결과 주님이 돌아가신 후 그들은 그 스승의 모습을 모범으로 하여 너나 할 것 없이 순교의 제물이 된 것입니다. 당신의 헌신과 노력이 지금 당장에는 빛나지 않을 지라도, 주님 오실 그날까지 유지 될 우리 공동체의 미래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투자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천국에서 우리를 기다릴 상급과 주님의 기뻐하시는 얼굴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렇게만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5. 사도행전은 사도바울 만의 것인가?

사도행전을 보면 13잘부터 28장까지의 주인공은 사도바울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전도여행을 통해 대부분의 초대교회들이 세워지거나 자리를 잡아간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사도바울 만의 힘으로 초대교회가 세워진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사도바울의 눈을 뜨게 해준 아나니아와 사도바울을 12사도와 안디옥교회에 소개한 바나바의 수고를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영적 아들이었던 디모데와 후계자 디도, 바울의 주치의였던 누가, 같은 직업에 종사하면서 아볼로를 기꺼이 가르쳤던 브르스길라와 아굴라도 빼 놓을 수 없는 공신일 것입니다. 이 외에도 로마서 16장에 보면 30명이 넘는 동역자들이 열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들 모두가 사도바울의 헌신이 아니었다면 뭉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바울 만으로는 초대교회 형성을 완성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본다면 사도바울과 그들의 동역자, 둘 중 하나만 가지고는 주님의 역사는 결코 이뤄질 수 없었거나 제한적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천국열쇠를 교회에 맞기셨고, 교회를 통해서 구원을 이뤄 가십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를 떠나서는 결국에 구원이란 있을 수 없고, 동역의 관계가 아닌 형식적인 관계만으로는 천국의 상급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들에게, 크게는 혜광교회를, 작게는 우리 대학 청년부를 주셨습니다. 이곳에 우리의 구원과 천국상급의 열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지금 위치는 어떠합니까? 어떤 원인에서건 많이 비켜나 있지는 않습니까?

마음이 맞지 않거나, 바르지 못한 공동체일 경우에는 다른 공동체를 고려하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닙니다. 하지만 회복된 공동체, 소망이 있는 공동체를 두고 방황하거나 기회주의적으로 자신의 필요만을 챙긴다면 그에게 남는 것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몇몇 사람이 근근히 지키고 있던 우리 공동체가 이제는 재기의 날개짓을 펼치려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몇몇 사람 만으로 회복되기란 어려운 일이거나 한계가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이 바울과 그의 동역자에 의해 쓰여졌듯이 대학 청년부의 회복과 부흥도 우리가 함께 할 때 만이 가능할 것입다. 이 회복과 부흥은 우리가 주님께 받은 자유와 기쁨을 유지하는데도 중요한 것입니다. 가만 팔짱만 끼고 있을 겁니까? 당신의 선택을 촉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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