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논설] 목회자의 자기정체성

주전담백 主前淡白 2008. 1. 31. 15:41

 

 

 

 

1) 목회자란?

 

 

 

목회자는 어떤 사람일까? 목회자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성경에서 말하는 목사직과 목회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목사직과 목회는 무엇인가? 시편 80편 1절에는 “요셉을 양 떼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라고 했고, 이사야 40:11에는 “그는 목자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라고 했으며, 요한복음 10:11에서는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했다. 그리고, 요한복음 21:17에서는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라고 했고, 베드로전서 5:2-3에서는 “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라고 말하고 있다.

이를 종합해 보면, 먼저 참 목자는 삼위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참된 목자, 진정으로 양 무리를 책임지는 목자, 변함없이 자신의 역할을 완수 할 수 있는 목자는 오직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그렇게 하셨듯이, 하나님은 목자의 사명을 인간에게 위임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이 맡기신 역할을 대행하는 청지기들이다. 우리는 목자의 사명을 하나님이 하신 그대로 본받아 시행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전서에서 밝히고 있는 대로 그분의 말씀대로 양 무리를 목양해야 하는 것이다. 즉, 목사직무의 핵심은 목사가 능동적으로 자신의 일을 궁리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을 중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2) 목회자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요소

 

그런데 오늘날 목회자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성경이 말하는 모습과 일치하는가? 현대사회의 사람들은 목회자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먼저 교인들에게는 어떻게 느껴지고 있을까? 과거와는 다르게 목회자는 멀게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목회자의 학력이 높아가고 대형교회 목회자들처럼 특급 대우를 받기를 원하는 목회자들이 성도들에게 가까워지기란 무척이나 어려운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그리고, 사회에서도 목회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들이 팽배해져 있다. “목사의 월급이 얼마라더라.” “목사의 월급 항목이 15가지가 넘는다더라.” “목사 아들은 교회 돈으로 유학 보내준다더라.” “목사가 교회를 다 해 먹는다더라.” 등의 부정적인 목회자의 모습이 사회 속에서 보편화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이렇게 권위적이고 부정적인 모습이 목회자의 본래 모습일까? 큰형님, 조폭두목, 이벤트 사장님, 경영 전략가 같은 모습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목회자의 정체성이란 말인가? 이처럼 목회자의 정체성이 위협받게 된 요소는 무엇일까?

첫째로, 목회자 스스로 청지기임을 인식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회직은 세상 기업의 C.E.O.와 다르다. 우리의 목회는 능동적일 때 보다, 오히려 수동적일 때가 많아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은 능동적으로 목회하려고 한다. 성도를 많이 모아 교회의 몸집을 불리기 위해, 인기 있는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사람을 자기 식으로 훈련시켜 자신의 목적달성에 이용하려고 한다. 이처럼 목회자 스스로가 수동적인 청지기가 아닌 능동적인 기업의 C.E.O.라고 생각하는 것이 목회자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첫 번째 요소가 아닌가 생각한다.

둘째로, 권위의식이 목회자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또 하나의 요소이다. 과거에 비해 오늘날 목회자들의 학력수준은 많이 향상되었다. 그러다 보니 같은 수준의 학력을 가진 사회 전문직 종사자들과 같은 대우를 받고, 자신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과거의 선배 목사님들이 받았던 목회자라는 이름에 걸맞은 존경을 받고 싶어 하는 권위의식이, 섬기는 종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케 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는 마치 종교개혁 이후 루터와 칼빈처럼 되고 싶어 유능한 인재들이 신학으로 몰렸지만, 루터와 칼빈같이 치열하고도 실제적인 투쟁과 신앙적 체험이 없어 자기모순과 잘못된 신학, 권위의식에만 도취되어 있었던 종교개혁 후기 목회자들의 일그러진 모습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른바 ‘목회성공’에 대한 잘못된 기준이 목회자의 정체성을 위협하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목회성공은 말씀을 올바르게 선포하고, 자신의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를 잘 돌보며,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교회로 인도하고 구원받게 하고 가르쳐 제자로 양육하는 것이다. 그런데, 1970-90년대 경제성장을 거치면서 한국교계에 이른바 “대형교회”가 등장하게 되었다. 대형교회는 경제성장에 맞물려 수도권으로 몰려든 사람들의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준 교회들이 엄청난 수의 성도수를 갖게 되면서 형성된 교회를 말한다. 이런 교회들이 엄청난 몸집을 자랑하면서, 엄청나게 들어온 헌금을 무기로 굵직굵직한 일을 하는 모습을 많은 목회자들이 보면서, 목회성공의 기준이, 성경적 기준에서 벗어나, 성도를 얼마나 많이 모으느냐 하는 것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목사는 부흥을 단순히 성도가 많이 들어와 헌금이 늘어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고, 이를 이루기 위해 성도들을 거리로 내 몰았으며, 그렇게 해서 확장된 교회의 평수와 재정을 자신의 이름으로 과시하듯 집행하고자하는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어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고 있는 것이다.

 

3) 정체성 유지를 위한 자기관리 실천지침

 

그렇다면, 본래의 취지와는 다르게 변질되어 버린 목회자로서의 정체성을 올바르게 유지하기 위한 실천적 지침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 나에게 적용할 지침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로, 내가 철저하게 낮아졌던 시기를 계속적으로 떠올리는 것이 ‘겸손’이라는 정체성 유지를 위한 첫 번째 지침이다. 나는 신학 하기를 결심하기 전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나와 오로지 교사가 될 꿈만을 꿈꿔왔다. 그런데, 졸업 후 임용시험을 4번이나 떨어지고, 그 결과 미래를 약속했던 초등학교 교사였던 여자 친구도 떠나고 학부 교수님들과 교회 성도님들, 친구들, 부모님에게 그동안 쌓았던 신뢰를 잃게 되었다. 그 힘든 시기를 보내면서 나는 타락의 길로 접어들었고, 많은 어두움의 일들을 경험했었다. 나는 그 나락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담당 부목사님의 권유로 신학을 생각해 보게 되었고, 내가 가야할 길은 이제 신학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1년 동안 신학대학원을 준비해 합격했고, 2005년부터의 나의 삶은 욥이 시험 후 회복된 것처럼, 좋은 교회에서 좋은 성도들과 함께 성공적인 전도사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고 현숙한 아내도 만나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나는, 성도들 가운데, 청년들 가운데 실망스러운 모습이 보인다 해도, 내가 좀 잘해서 우쭐해 질 수 있는 상황에서도, 과거에 실패하고 좌절하여 사람들에게 도저히 밝힐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나의 모습을 되씹으면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려고 하는 나의 교만을 잠재울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겸손의 미덕을 유지해야하는 목회자의 정체성 유지를 위한 나의 첫 번째 지침이다.

둘째로, “지금 좀 바쁘네요” “저는 도와드릴 능력이 없네요.” “죄송합니다. 안돼겠네요”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청지기’라는 정체성 유지를 위한 나의 두 번째 지침이다. 이런 다짐을 한 것에는 배경 이야기가 있다. 신대원을 합격한 후 교회에 친분이 있던 한 집사님께서 나에게 해 주신 말씀이 있었다. “희재야! 목회길 들어서거든, 절대로 ‘시간 없어요’, ‘돈 없어요’라는 말은 하지마라. 그것은 곧 하나님이 없다는 말이거든, 알겠지?”라고 해 주신 말씀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무차별적으로 날아오는 도움의 부탁들과 업무의 포탄 속에서도 “죄송합니다. 지금 너무 바빠서 안돼겠네요.” “저는 그것을 도와드릴 능력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 결과, 하나님은 30분이 3시간이 되게도 하셨고, 없던 돈이 생기게도 해 주셨다. 이렇게, 시간과 능력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생각하고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수동적으로 순종할 때, 나의 청지기적인 정체성을 반드시 유지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대형교회의 가능성이 있어도 대형교회를 만들지 않을 것이다. 나는 분립에 대한 적극적인 의사를 가지고 있다. 1000명 성도가 넘지 않도록 계속적인 분립개척을 추진할 생각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오늘날 부교역자들의 가장 큰 고민은 담임목회지에 대한 고민이다. 그래서 현재 목회에 혼신의 힘을 다하지 못하고 기회만을 엿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교회 부교역자들을 3년을 지켜본 후, 자신의 교구 성도들 중 부교역자를 따라 분립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부교역자를 따라 분립시켜줄 생각이다. 그래서 부교역자들이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현 부교역자의 역할에 충실하도록 할 생각이다. 분립 시키지 않고 부교역자를 수하에 두고 교회를 확장하고 또 확장한다면 대형교회가 이뤄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교회가 필요 이상의 공간을 가질 필요도 없고, 교회통장에 잔고가 넘치기 때문에 교회에 분란이 일어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가 분립을 시킬 수 있는 재정적 인적 수준, 즉 1000명 성도에 도달하면 아낌없이 부교역자들이 성도들을 데리고 재정, 행정, 명칭적으로 완전히 분립해서 같은 생각을 가지고 건강한 교회를 꾸려 나가도록 도울 생각이다. 이를 통해, 목회 성공이 교회 평수, 성도 수, 교회 재정에 있지 않고, 온전한 말씀 선포, 아낌없는 성도 양육, 끊임없는 전도와 교육에 있음을 유지해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