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논설] '성령사역'에 대한 16가지 묵상

주전담백 主前淡白 2008. 6. 9. 15:54

 

 

 

1. 내 생각의 변화

 그동안 내가 여러 경건서적 등을 통해 오순절 계통의 성령론에 물들어 있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목사가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 이유도 깨닫게 되었다. 공부하지 않은 목사가 성도를 얼마나 엉뚱한 길로 인도할 수 있는가에 대해 절실히 느끼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성령의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 성령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내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2. 성령론적인 신학

성령론적으로 모든 신학의 내용들을 봐야 하고 볼 수 있다는 것에 도전 받았다. 성령론을 다른 교리와 분리해서 고찰해서는 안되고, 성령론이 모든 교리를 관통하게 해야 한다는 박교수님의 주장에 많은 깨달음과 도전을 받았다. 삼위일체론이 사변화 된 이유도 성령론과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고, 교회의 존재 또한 성령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선교론 또한 성령의 사역임으로 성령론과 연계해서 봐야 함과 성화론도 성령안에서의 성화임을 박교수님은 강조하고 계신다. 이 수업 내용을 통해 성령을 떠난 신학은 사변화 될 수 밖에 없고 이론으로 전락하여 도서관 서고에 쳐 박혀 있을 수 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나의 신앙도 철저히 성령 안에서 검증하고 다듬어야 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3. 성령충만한 자의 모습

성령충만한 자는 자신을 숨기는 지이다. 그렇게 우리 자신을 숨기려 할 때 성령의 얼굴이 우리에게서 드러난다.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사람은 사단의 얼굴이 드러나는 사람이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우리는 성령충만을 자신의 도구쯤으로 생각해서 성령충만 해 졌을 때, 은근히 과시하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그것이 결국 사단의 모습이라 생각하니 정말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4. 성령은 인격이다.

 성령은 인격이다. 종교적 야망을 이루는 원동력이 아니다. 성령을 가장 남용하기 쉬운 사람, 성령충만을 가장 받기 어려운 사람이 바로 성직자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성령님과 인격적인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일을 잘 하는 것은 결국 주님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나도 요즘 기도하거나 묵상할 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까? 어떻게 하면 성령의 뜻을 거스르지 않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이는 결국 성령충만이 야망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아닌, 인격적 교제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자연적인 결과가 아니겠는가? 이런 생각을 수업을 통해 갖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5. 성령충만을 받는 비결은.....

성령충만을 위해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비우시고 비참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능력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게 하신 후에 우리에게 역사하신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가질 때, 필요한 것을 더 가지기 위해 갖는다는 식으로 신앙을 갖게 되는데, 성령충만을 갈구하는 우리들도 우리가 가진 것의 개수를 늘리기 위해 가지려 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바다에서 몸에 힘을 뺄 때 비로소 수영을 할 수 있게 되듯이 성령충만도 나의 주도권을 내려 놓아야겠구나 하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6. 예수의 영이신 성령

 성령님은 기독론적 관점에서 봐야 한다. 즉, 성령사역의 내용, 특성은 기독론적으로 특징지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 성령론은 하나님 중심의 성령론, 성령 중심의 성령론이라고 지적하시면서 이렇게 되면 다른 종교를 통해서도 성령이 역사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게 된다고 지적하시면서 성령의 주된 관심은 예수님 중심으로 영광을 돌리는 것임을 강조하고 계신다. 이 내용을 들으면서, 다시 한번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이심을 인식하게 되었고, 예수님을 통해 성령님을 만나고 역사하심을 기대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7. 교회의 위대함

 교회가 겉으로는 연약하나 삼위일체가 실현되는 유일한 공간이다. 즉 하나님의 영광은 ‘성막’ ‘성전’ ‘예수’ ‘교회’로 이어지고 있으며, 교회에 성령이 충만하시면 그리스도가 충만하시고 곧 삼위하나님의 충만이 이뤄지는 것이다. 개신교도들의 말씀중심과 형식타파주의는 좋은 점도 있지만 삼위 하나님의 풍성함을 놓치는 안타까움도 있다고 생각된다. 예배의 풍성함 오감으로 느끼는 예배의 감동이 머리로만 느끼는 예배로 평가절하 되어 있는 것이 너무 아쉽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늘날 개신교회를 이탈해 천주교회라 가는 사람들의 이유 중에도 개신교회 예배의 세속화 또는 가벼움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것을 보면 교회에 임하시는 삼위하나님의 충만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8. 종말론적인 성령충만

 종말론적인 소망, 천국에 대한 소망이 충만한 자가 성령충만을 받을 수 있다. 성령은 궁극적으로 종말의 영이기 때문에 성령 안의 삶은 근본적으로 종말론적인 삶이기 때문에 성령안의 공동체도 종말론적인 공동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종말론적인 성령충만의 자세가 왜 필요할까? 그것은 성령충만은 이 땅을 살기위한 도구가 아닌 천국의 삶을 준비하는 방편으로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성령충만을 이 땅을 위한 도구로만 생각해 오지 않았는가? 성령충만을 종말론과 연결시킬 수 있었던 좋은 계기가 되었다.

 

9. 한탕주의식 성령세

 획기적인 성령세례를 통한 변화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계신,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고, 활발히 움직여 다양한 방법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현대 교인들은 육신의 정욕에 빠져 성화의 길에서 멀어져 있는데 이런 모습에서 확기적인 변화를 위해 오순절 성령운동을 도입하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운동의 가르침은 성경에 근거도 없고, 성경적인 내용도 아니라고 지적하시면서, 획기적인 성령체험 성화가 존재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성령체험 전의 문제 있는 삶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보고 타락의 합리화를 주장할 수 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성령세례는 단회적인 것이지만 성령충만은 다양하게 임함으로 성령세례를 성령충만의 다양한 모습의 한 측면으로 보아야 한다. 일반인이 어떤 계기를 통해 영웅이 되는 식으로 성령세례를 생각한다면 이것이 무슨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세례이겠는가? 한번의 성령세례를 통해 엄청난 변화를 기대하기 보다, 점진적이고 다양한 과정을 통해 성령충만을 받기 위해 더 많이 노력해야 겠다.

 

10. 상대적 개념인 성령충만

성령충만은 완전이 아닌 상대적인 개념이다. 모두에게 충만한데 개인의 분량이 다를 뿐이며 우리는 우리 맘 속의 모든 방을 성령이 소유하도록 하게 해야 한다. 성령이 충만해 진다는 것은 성령이 적었다가 많아진다는 의미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어린아이의 폐와 어른의 폐의 크기가 다른 예와 방에 충만하지만 몇 개의 방에 충만한가의 비유를 통해 성령충만의 상대적인 개념에 대한 설명이 내게 성령충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했다.

 

11. 성령충만과 혀의 컨트롤

 성령충만의 결과는 혀의 컨트롤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성령충만한 자는 말을 지배받게 된다. 그리고, 목사는 말을 많이 하게 됨으로 대중 앞에 모두 들어나게 됨으로 사석에서의 말도 조심해야한다. 나도 신앙의 연수가 깊어가면 깊어갈 수록 말수가 줄어듬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확인되지 않은 말이나 비난의 말 등은 가급적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성령충만과 관련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더욱 말조심을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2. 현대교회 예배의 문제점

 현대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교회의 예배 속에서 초월자의 임재, 종교적인 체험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레오날드 스윗이 “포스트모던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을 인용하시면서 장대현 교회의 부흥 장소, 웨일즈 부흥장소(불신자가 예배당 문을 열었을 때 여기 하나님이 계신다는 체험을 하고 계단에 있다가 하나님을 영접했다), 신접한 무당(전에 접했던 신과는 다른 영을 접했다)의 고백 등이 우리에게도 일어나야 한다. 성령의 임재가 있는 말씀은 식상한 말이라도 큰 감동으로 다가가게 되어 있다. 우리 목사님이 주안장로교회 나겸일 목사님과 친분이 있는데 목사님 말씀을 들어보면 나겸일 목사님의 설교가 그렇게 탁월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임재가 있는 말씀을 하기 때문이라고 하신 것이 생각난다. 나도 미사어구나 독특한 발상으로 설교를 포장하기 보다 성령충만한 상태에서 성령의 뜻을 전하려고 노력하는 연습을 하여 거룩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종교적 체험이 있는 예배를 만들어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3. 진정한 믿음

 믿음은 은혜를 우리 속에 수납하게 하여, 그 은혜로 우리의 삶 속에 결과물을 산출케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인 것이다. 오순절계통의 성령론자들이 성령충만의 조건으로 회개, 성결, 자기부인, 양도, 순종, 믿음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틀렸다. 성령충만은 믿음으로 시작되고 믿음 후에 회개, 성결, 자기부인, 양도, 순종 등이 믿음을 가진 신자의 책임으로 따라와야 한다. 믿음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선행되어야 신비한 성령충만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고 그것에 힘입어 우리는 회개하고 성결하게 하려 노력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4. 성령충만을 받지 못하는 이유

성령충만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갈망하지 않기 때문이고 갈망이 있어도 받지 못하는 것은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원동력으로 쓰려고 하기 때문이다. 중동지역에서는 하루에 물을 일곱병 마셔야 살 수 있다고 한다. 그곳에서 사슴의 갈망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성령충만이 이뤄져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평소 성령충만을 얼마나 갈망하고 있는가? 성령충만이 내게 이뤄지기 위해 어떠한 것들을 포기하고 있는가? 너무나도 부끄러운 나의 모습임을 또한 깨닫게 되었다.

 

15. 영적인 질량보존의 법칙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사랑하게 될 때 그것이 우상숭배의 근원이 된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사랑하게 될 때 그 공백에 죄들이 몰려오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질량보존의 법칙처럼 어떤 것이 많이 차지하게 되면 어떤 것은 자연히 줄어든 공간에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마음 중심에 놓으려 할 때 우리 마음에는 성령이 기뻐하지 않는 것들이 채워지는 것이다. 이런 생각 가운데서 ‘아 디아포라’의 관점에서 허용했던 내 주변의 것들을 점검해 봐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6. 병고침에 대한 바른 이해

 사도시대의 병고침이 오늘날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하나님 나라 도래를 위한 씨앗을 심은 것이고, 사도들의 치유는 사단의 세상에 교회의 기초를 닦는 과정 속에서 치유를 베풀었다. 그런데, 이런 특수한 상황과 권위를 가진 치유사역이 현대사회에 동일하게 일어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고 구별되어야 한다. 오늘날 오순절 계통, 신비주의 계통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사도시대의 병고침이 오늘날에도 일어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성령님은 창조질서에 맞춰 기적을 베푸신다. 이 내용을 좀 오늘날 오순절 계통의 성도들이 들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성경적인 병고침에 대한 지식을 쌓아 갔으면 한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을 자신의 능력으로 소유하려는 욕심을 가진 성도들이 점점 줄어 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