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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사 논문] 자유주의 신학의 인식론적 전제에 대한 개혁신학적 비판-3

주전담백 主前淡白 2011. 7. 8. 11:29

 

 

 

 

 

1. 몰트만의 인식론적 전제

 

20세기 초, 바르트를 중심으로 한 신정통주의 신학이 개신교 신학 전반에 걸쳐 지배적인 영향을 행사 한 이후, 20세기 후반에는 각 지역별로 우후죽순(雨後竹筍) 격으로 다양한 신학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세속화신학’ 혹은 ‘사신신학’이 일어났다. 또 미국에서는 ‘과정신학’이 일어났다. 이러한 새로운 신학운동을 클라스 루니아(Klaas Runia) 교수는 ‘신자유주의신학(Neo-Liberalism Theology)이라고 이름하였다. 이 신학들은 모두 실존적인 차원을 중심으로 성경의 무오성을 인정하지 않는 신정통주의 계시관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신학의 조류들이라는 점이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신학의 역사 속에서도 확인되는 것은, 성경을 인식론적 전제로 삼지 않을 때, 신학은 각자의 이성적 사고에 의해 변질될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이런 흐름 속에서 판넨베르크의 역사신학과 흐름을 같이 하면서 등장한 신학이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이다.

 

 

1.1. 희망 (Hope)

 

 

1.1.1.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1926~ )은 1926년 함부르크에서 출생했다. 몰트만은 제2차 대전에 참전하였다가 1945-1948년까지 3년간 벨기에와 영국에서 전쟁포로생활을 하게 된다. 이 시기에 의미심장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읽은 성서를 통해 기독교의 희망을 찾은 그는, 포로생활을 끝낸 뒤 신학을 전공해, 1952년에 괴팅겐대학(University of Göttingen)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1968년까지 6년 동안 부레멘의 복음교회에서 목사 일을 하게 된다. 그 뒤 1963년까지 뷔페르탈(Wuppertal)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의 교수로 봉사한 다음 1964-1967년 본대학(University of Bonn)에서 교수생활을 한 후, 1968년부터 튀빙겐대학(University of Tübingen)에서 교수로 봉사하고 있다.

몰트만은 1964년 ‘희망의 신학’(Theology of Hope)을 출판함으로써 현대 신학계에 혜성과 같이 등장했다. 몰트만의 이 ‘희망의 신학’은 기독교의 새로운 해석이다. 이것은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의 초월주의와 키에르케고르의 변증법적 신학 등과 같은 형이상학적이고 관념론적인 신학접근에서 벗어나 형이하학적이고 실재론적인 역사와 사회를 신학의 전제로 삼고 있는 대 변환인 것이다.

몰트만의 신학에 있어서 희망은 신학적 사고의 토대, 동기, 출발점, 인식론적 전제가 된다. 그 희망을 통해 신학의 모든 항목들을 조망하려고 한다. 그 희망을 담아내기 위해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기독교 종말론이다. 몰트만은 종말론을 마지막 날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하는 것은, 종말론을 한갓 신학의 부록으로 또는 여타의 것과는 상관없는 조직신학의 마지막 장으로 삼는 일이라 하며 불평했다. 아래의 글을 보면 그의 확고한 의지를 알 수 있다.

종말론은 기독교 희망론을 의미한다. 종말론은 기대된 것과 그것에 의해서 움직여진 희망을 포함한다. 기독교는 다만 하나의 부록이 아니라, 전적으로 종말론이며, 희망이고, 앞을 향한 전망과 성취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현재의 혁신과 변화이다. 종말론적인 것은 기독교에 관한 어떤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매개체이며 신앙에 있어서 모든 것이 그것에 의해서 조화되어 있는 원음이며, 여기서 모든 것이 그 속에 잠겨 있는 기대된 새로운 날의 서광의 빛이다...... 종말론은 엄밀히 말해서 결코 기독교의 가르침의 한 부분일 수가 없다. 오히려 모든 기독교의 선교, 모든 기독교의 실존, 아니 전 교회의 성격이 종말론적으로 지배되어 있다.

몰트만은 종말론을 신학의 중심에 놓으려고 애쓴 신학자이다. 몰트만의 종말론은 하나님의 계시를 약속으로서, 미래에 대한 희망의 근거로 해석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목적은 정의에 대한 희망 실현과 인류를 화목하게 하여 모든 창조물을 평화를 유지시키는데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몰트만은 미래에 희망을 두고 현재의 사회를 변혁시키는데 힘을 쓴 신학자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희망을 전제로 현재의 사회정의와 평화유지에 강조점을 두다 보니 개인적, 인격적, 영적 구원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것이 몰트만 신학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 할 수 있다.

 

 

1.1.2. 희망을 전제로 한 신학방법론

 

몰트만은 현대 신학자들 중, 바르트, 본회퍼, 판넨베르크와 더불어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을 강하게 받고 있는 신학자 중 하나로 분류되고 있다. 그런데 몰트만의 신학이 비판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그의 인식론적 전제가 특별계시이라기보다 희망이기 때문이다.

몰트만은 희망을 인식론적 전제로 하여 신학의 모든 항목들을 해명하려고 한다. 몰트만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확신으로 만들고, 이 희망은 고통과 죽음의 경험적 현실을 넘어서게 한다고 칼빈의 말을 인용해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앙은 세상도피나 체념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와 관련해 하나님의 평화는 약속된 미래를 성취하기 위한 세상과의 투쟁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표적인 모습이 그리스도의 부활이라고 몰트만은 말하고 있다. 아래의 글을 읽어보자.

그리스도에게 희망을 둔 사람은 주어진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고 현실에서 고난을 당하고 현실에 대항하기 시작한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세상과의 투쟁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약속된 미래의 날카로운 가시가 아직 성취되지 않은 모든 현재 생활 속에서 냉혹하게 찌르기 때문이다.

몰트만은 희망이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영향을 주지 못하거나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고 말하면서, 기독교 종말론은 희망을 세상적 사고 속으로 가져오고, 사고를 신앙의 희망 속으로 가져와 현실적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몰트만의 사고는 피동적인 기다림이 아닌 능동적인 참여를 강조한다. 이러한 사고는 매우 급진적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주고 있다. 이러한 그의 희망의 인식론적 전제가 그대로 투영되어, 몰트만은 하나님 나라가 정치와 혁명으로 지상에 현실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신학이 칼빈주의적인 역동적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고 있다고 해도 정통신학이 지향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중생한 자들의 하나님 나라가 아니기에 그의 신학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희망을 인식론적 전제로 한 그의 신학을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로 몰트만은 계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몰트만은 계시를 하나님의 희망찬 종말에 대한 약속으로 이해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계시를 로고스의 차원으로 이해하기보다, 실재적인 역사 속에서의 언어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의 글을 읽어보자.

성서에서 증언된 하나님의 계시가 ‘영원한 현재의 나타남’(Epiphanie)으로 이해되는 때, 결국 그것은 희랍적 사고와 탐구의 영향이다. 그것은 엑소더스와 부활의 하나님보다는 파르메니데스의 하나님을 가리킨다. 부활한 그리스도의 계시는 이 영원한 현재의 에피파니의 형태가 아니고 진리의 약속된 미래의 묵시로서의 이해에 필요하다. 약속에서 분명한 진리의 이 미래에 의해서 인간은 그 가능성들과 위험들에서 현실을 역사로서 경험한다.

그리고 이 계시는 정지된 것이 아니라 새 지평을 향해 돌진하는 역사로 경험하게 된다고 몰트만은 말한다. 다시 말해 계시의 역사는 순환하는 역사가 아니라 약속되고 성취되는 희망찬 미래로 향하는 일직선적인 종말론적 역사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진적인 계시관은 바르트의 초월적 계시관과 반대되는 것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역사 속에서 파악되고 실현되어져야하다고 몰트만은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몰트만은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기본적인 점은 칼빈과 바르트와 같다. 하나님은 하나님에 의해서만 알려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일반적이고 이론적이며 객관적 진리로 이해될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칼빈과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 있다면, 몰트만은 하나님은 오직 인간이 자기 실존을 동원해 파악할 때만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바르트와도 차이가 나는 점은, 몰트만은 인간 실존은 역사적이기 때문에 인간 존재의 역사성에 의해 하나님의 존재도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몰트만은 하나님을 역사라는 시간의 과정 속에서 만 파악할 수 있고, 역사라는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일부만 계시된 상태여서 완전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미래를 그의 본질로 가지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역사의 과정 속에서 인식되어지는 분이라는 것이 몰트만의 견해이다. 아래의 글을 통해 그 내용을 확인해 보자.

하나님은 역사의 종말에서 비로소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되어가고 열려있고 약속들의 행위에 따라서 역사 한 가운데서 인식된다....하나님의 인식은 하나님의 미래에 참여하는 지식이요, 하나님의 약속들을 통해서 생명이 주어지는 희망들에 의해 확증되는 하나님의 진실의 인식이다.

그래서 몰트만은 하나님은 초세계적인 존재도 아니고, 세계의 전체를 뜻하는 대재적 존재도 아니며, 우리 위에 혹은 우리 안에 계신 분도 아닌, 우리 앞에서 우리에게 희망을 던져 주시며 우리를 이끌고 가시는 하나님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나님은 마치 주인이 애완견을 먹이로 유인하듯이 계시를 던져 주시고 인간이 그 계시와 약속에 순종하면 답례로 자신을 보여주시는 그런 분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몰트만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정통신학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성육신하시고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후, 부활하신 분으로 이해하고 있다. 아래의 글을 읽어보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견해는 정통신학자의 견해와 다를 바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믿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사실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들에게서 예수는 시대의 진보와 함께 항상 까마득한 역사적 과거로 가라앉은 역사적 인물이 된다. 예수를 이와 같이 역사로 환원하는 자유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슬람교와의 차이는 단지 한 발자국일 뿐이다. ‘하나님은 믿는다, 하지만 예수는 믿지 않는다’라는 태도는 그리스도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 이해에 자신의 희망의 인식론적 전제를 가미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실존들의 미래의 실재를 보여주는 인간의 희망이 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 실존들이 희망하는 미래의 실재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뜻하는 것이다. 아래의 글을 읽어보자.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동일성이 그것으로써 요구되고 지시되는 그리스도의 칭호는, 동시에 부활자의 아직 나타나지 않은 모든 미래를 예기한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세계와 죽음의 시련을 통해서 신앙을 유지해 나가는 희망은 여기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리고 몰트만은 예수의 존재가치 또한 부활에 있다고 말한다. 나사렛 예수의 생애, 사역, 선포, 수난의 실제성이 인정받는 이유가 부활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행위로 인해 인정받게 되는 분이 아니시다. 그런데 이런 결과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부모가 부모노릇을 해야만 부모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인과율적인 접근에 지나지 않는다.

끝으로 몰트만은 교회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19세기 이후 교회는 공중예배(Cultus Publicus)의 성격을 잃고 사적예배(Cultus Privatus)가 되었다고 비판한다. 교회가 공적이고 사회적인 의무로부터 벗어나 사사로움, 내면성, 경건을 중심하는 종교성으로 변질되게 되었다고 몰트만은 말한다. 그렇다면 몰트만은 교회의 존재 목적을 무엇이라 말하고 있을까? 교회는 단순히 영혼의 구원, 악한 세상으로부터의 개인의 구원, 아픈 양심의 위로만을 위한 공동체가 아니라고 말한다, 아래의 글을 통해 확인 해 보자.

교회에 고유한 기대의 지평에는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 장차 실현될 정의, 장차 올 평화, 인간의 장차 이루어질 자유와 품위의 기대의 지평 등이다. 기독교는 세계가 그 현재의 모습대로 있든지 그 모습대로 존속할 것이라는 것으로써 인류를 섬기는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장래를 향하여 약속된 것으로 변화되고 그것이 되는 것으로써 인류를 섬겨야 한다.

몰트만은 교회가 미래의 희망찬 완전한 하나님 나라 도래를 위해 세상을 섬기는 기관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세상을 섬기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적인 세 가지 직분, 즉 예언자적 직분, 제사장적 직분, 왕의 직분을 수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로 예수의 예언자적 직분을 본받아 교회는 해방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말한다. 회개를 통해 영혼과 몸에 대한 자유와 해방을 이룰 뿐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 자신의 삶의 방식과 사회적인 제도까지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이 몰트만의 주장이다. 둘째로 예수의 제사장적 직분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과 죽음으로 인간을 죄에서 해방시켰고, 권력의 우상들로부터 해방시키셨으며, 하나님께 버림 받음으로부터 해방시키셨다고 몰트만은 말한다. 그래서 교회도 예수를 본받아 제사장 직분에 참여하여 가난한 자, 약한 자, 사회가 거부하는 자, 잡힌 자, 핍박 받는 자들에게 십자가의 그늘을 제공해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셋째로 예수의 왕의 직분을 수행하는 교회는 해방된 자의 공동체로서 오직 한 주와 한 성령의 지배를 받는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특권과 권력이 지배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의 다스림 밑에서 모두 공평하게 해방의 기쁨과 축제를 누리는 곳이 교회라는 것이다. 교회가 이러한 메시야적인 역할을 수행해 감에 있어 교회는 그리스도의 해방자 되심을 본받아 경제 착취에서의 해방, 정치적 압박에서 인간의 존엄성의 회복을 이루는 해방, 문화적 차원에서 소외당한 인간에 대한 해방, 절망의 상태에 있는 인간의 해방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몰트만은 교회를 세상에서 압박 받는 자에게 구원을 이룩하는 도구로 보고 있고 세상의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를 이루기 위해 몰트만은 사회주의자나 휴머니스트들까지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여기에서 몰트만은 교회의 해방운동을 사회 운동의 차원으로 확대시켰다. 그 결과 그의 해방활동은 영혼구원보다는 사회와 육체 구원에 치우치게 된 것이다.

 

 

1.1.3. 긍정적인 평가

 

김영한 교수는 몰트만을 칼빈의 신학과 구(舊) 개혁주의적 전통을 나타내는 “역동적인 하나님 나라 의식”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김의환 교수 또한 몰트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몰트만은 불트만의 비신화화 된 실존주의적 종말론과 현세를 외면하는 개인주의적인 종말론을 비판하고 현재적 의미의 종말론을 강조함으로 종말론의 혁신을 가져왔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지상교회가 세상에 보냄을 받은 출애굽의 교회로서의 사명을 깨닫게 해준 장본인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몰트만의 신학은 현대 신학자들 중에서 그래도 정통신학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불트만(Rudolf Karl Bultmann)의 비신화화 신학의 영향으로 약화되었던 예수의 부활에 대한 확고한 그의 주장은, 세속신학에 의해 죽어가던 하나님에 대한 논의를 재개시킨 위대한 공헌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그리고 희망을 강조하면서, 온전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 현실 속에서 실질적으로 감당해야 할 교회의 역할을 재조명했다는 점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점점 게토(ghetto)화 되고 있던 시절에, 교회를 고립이 아닌, 사회적 정의 실현의 선봉장으로 인식시켜 준 몰트만의 신학은, 정교분리사상으로 인해 사회의 불의를 외면할 수밖에 없어 갈등하고 있었던 많은 젊은 지성인들에게 도전의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1.1.4. 부정적인 평가

 

그러나 부정적인 평가도 만만치 않다. 박형룡 박사는 몰트만의 신학은 성경을 기준으로 판단해 보면 많은 문제점들을 보이고 있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몰트만은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시는 영원불멸의 하나님으로 보지 않고, 희망이라는 자신의 인식론적 전제로 하나님을 해석하기 위해 미래에만 존재하시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만 존재하는 분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간하배 교수 또한 몰트만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몰트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역사적 사실로서의 부활로 보기보다, 미래의 희망으로서의 부활로 보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박아론 교수도 몰트만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데,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의 급진성은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블로흐의 ‘미래적 인간론’으로 기독교 종말론을 변질 시킨 것으로 교회의 정치활동을 선교로 인식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인간의 경제적 평등을 구원으로 가르치는 오류를 범했다고 지적하면서 현재, 과거, 미래의 역사적 3차원을 창조 주관,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추방시킨 절망의 신학자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상원 교수는 몰트만을 성부수난설자, 범신론자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몰트만이 경제적, 정치적인 사회정치적 의미에 집중한 나머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지니는 독특성을 희생시켰다고 말하면서 몰트만에게 있어 그리스도는 성도들 안에 현존하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 받는 자들 가운데 임재하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고 비판하고 있다.

위의 학자들의 주장과 같이, 몰트만의 신학에는 부정적인 면들이 더 많다. 첫째로 하나님을 시간에 종속된 불완전한 분으로 만들어 버렸다. 하나님을 미래의 가능성 중 하나로서의 존재로 생각할 뿐, 오직 확실한 것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는 인간 뿐이라는 것이 몰트만의 주장인 것이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으로 확실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 부활을 자신의 미래의 희망 의존적인 인식론적 전제에 끼워 맞추기 위해 마지막 부활의 시작이요, 진리의 보장이며 첫 열매라는 막연한 기대감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분명 잘못된 신학인 것이다. 셋째로 신학을 처음부터 끝까지 종말에 대한 희망을 인식론적 전제로 놓고 수립한 것 또한 잘못이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종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대망도 아니고 공산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유토피아 건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종말론도 아닌 종말론을 중심으로 모든 신학을 다시 수립한 몰트만의 신학은 분명 잘못된 신학인 것이다.

 

 

1.2. 몰트만의 인식론적 전제 비판

 

1.2.1. 몰트만의 희망, 유토피아 (Utopia)

 

몰트만 신학적 뼈대는 아주 건전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더 나은 미래의 희망을 위해 오늘을 준비하자.’가 그의 신학의 뼈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더 나은 미래의 희망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에 있어서 ‘더 나은 미래의 희망’에 대한 이해와 ‘무엇’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싶다. 몰트만은 미래의 희망을 위해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을 믿어 의에 이르게 하는 것에 집중했던 것이 아니라, 경제 착취에서의 해방, 정치적 압박에서의 해방, 소외에서의 해방에 집중했고, 이를 위해 사회주의자(Socialist), 휴머니스트(Humanist)들과 연대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이루고 싶어 했던 미래의 희망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고, 세상 사람들이 이루고 싶어 하는 유토피아와 같은 이상향이었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몰트만의 신학에 대해 박형룡 박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몰트만의 종말관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려 그리스도 안에서 오신다는 성경적 중심을 잃었다. 그의 종말론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형적 재림이 발견되지 않고 인생이 미래를 내다보는 인생중심의 체계이다. 그런 의미에서 몰트만의 사상은 종말론이기보다도 미래론(Futurology)이며, 그의 미래의 최종 목표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충만한 나타나심이 아니고 지상에 건설될 이상향이다.

박형룡 박사가 지적했듯이, 미래의 희망에 대한 몰트만의 준비는 인본주의적인 사고와 방법으로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하는 세상의 미래 준비와 결론은 다르다 할지라도 내용적으로는 동일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유토피아’라는 단어는 그리스어의 부정을 의미하는 접두어 'ou'와 장소를 의미하는 ‘topos’를 조합시킨 합성어로서, 토머스 모어가 그의 저서에서 가상한 자복의 섬의 나라의 명칭을 라틴어화 시켜서 사용하고 나서부터 ‘이상향’ ‘이상국가’ ‘이상사회’를 표현하는 보통명사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유토피아는 소극적으로는 구제와 봉사 나눔 등의 인도주의적 차원의 행동들과 의학, 과학, 농업 등의 기술문명 차원의 발전을 통해 만들어지는 이상향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집단행동을 통해 사회제도와 불합리를 개선하고, 최악의 경우에는 무력을 동원해 권력구조나 국가체제의 변혁을 통해 만들어지는 이상향이라고 할 수 있다. 몰트만이 미래에 희망 했던 것이 바로 유토피아였던 것이다.

 

 

1.2.2. 유토피아와 하나님 나라

 

 

그렇다면 유토피아와 하나님 나라가 동일할 수 있을까? 현대신학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 사상을 유토피아와 일치시키려고 하는 여러 가지 시도가 있어왔다. 리츨(Albrecht Ritschl)은 하나님 나라의 개념이 기독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리츨은 두 개의 중심점을 갖는 타원형으로서 기독교를 설명하였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속과 하나님 나라였다. 리츨은 후자를 사랑에 의하여 영감된 행동을 통한 인류의 도덕적 기관이라고 해석했다. 이는 인간의 도덕적 이상인 유토피아와 하나님 나라를 등식관계에 놓은 사고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하르낙(Adolf von Harnack)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관한 예수의 메시지 중에는 미래적 사건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있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그 나라의 도래는 내면적이며 어느 순간에 이미 현재적인 것이 된 그 무엇이 보인다.”고 하여 하나님 나라에 유토피아적 요소가 있음을 말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몰트만에게도 이어져, 미래에 희망찬 유토피아적인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보증삼아 오늘 이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희망의 신학을 펼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유토피아와 하나님 나라는 다르다는 것이다. 첫째로 유토피아와 하나님 나라가 추구하는 1차적인 목표는 고통을 주는 근본적 원인의 제거일 것이다. 그런데 유토피아에서는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을 외부적 요인으로 인한 소외, 이를 통한 동질성의 상실, 이를 통한 비인간화로 본다. 다시 말해 유토피아에서는 인간소외로 인한 비인간화를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 죄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의 고통의 근본적 원인은 내부적 원인으로서의 불순종, 교만,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려는 마음, 즉 죄인 것이다. 그러므로 유토피아와 하나님 나라는 출발부터 같을 수 없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유토피아와 하나님 나라가 추구하는 2차적인 목표는 고통의 해결을 넘어 행복추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유토피아에서는 인간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이 땅에서, 경제적 평등과 인간소외의 극복을 바탕으로 하여 자아를 성취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통해 죄가 씻어 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성령과 동행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되고, 결과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됨으로 말미암아 성취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유토피아와 하나님 나라는 2차 목적을 이루는 방법과 장소에 완전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절대 같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유토피아와 하나님 나라는 근원적으로 하나가 될 수 없는데, 몰트만은 이 둘을 합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1.2.3. 단추를 잘못 끼운 몰트만

 

몰트만이 근원적으로 다른 유토피아와 하나님 나라를 합치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한 공산주의 철학자의 책을 읽고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몰트만은 막시스트인 블로흐(Ernst Bloch)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몰트만은 희망의 신학이 나오게 된 동기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희망의 신학의 동기는 처음에는 나의 개인적 체험에서 온 것이고, 그 후 에른스트 블로흐의 희망의 철학에서 자극을 받았다. 그러나 내가 한 것은 희망의 신학이었다.

최홍석 교수는 몰트만의 소망의 신학은 기독교 신앙과 헤겔, 마르크스, 블로흐로 이어지는 변증법적 철학의 융합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몰트만은 블로흐의 희망의 철학을 가지고 기독교 신학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철학 사상에 기독교 신학을 끼워 맞추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말해 흰 셔츠에 별모양의 빨간색 단추를 끼듯이 기독교 신학에 어울리지 않는 철학 사상을 끼워 넣어 변질된 기독교 신학을 만들어 내고 만 것이다.

몰트만은 자신의 신학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성경의 권위도 무참히 짓밟아 버린다. 몰트만은 기독교 성경에 있는 이 세상의 종말에 관한 기록 또는 해설을 역사적으로 수락하는 정통적 종말론은 현실도피와 염세사상의 원인이 될 수밖에 없으며 인간의 관심을 현세에서 내세로 전환시킴으로써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기독교는 인간에게 현실을 잊게 하는 아편이다.’라는 혹평을 정당화 시킨다고 말했다. 이처럼 몰트만은 공산주의 철학에 근거한 잘못된 인식론적 전제를 가지고 신학을 연구했기 때문에, 기독교 신학의 변질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1.3. 희망 의존신앙과 특별계시 의존신앙

 

1.3.1. 몰트만의 희망의 문제점

 

 

몰트만은 희망을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신앙적인 기대”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신앙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것이고 희망은 그것이 나타날 때를 기다리는 기다림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기초는 희망이 되고 희망이 신앙을 살찌우고 꽃피우게 된다고 몰트만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몰트만의 신학이 내세우는 표면적 외침은 아주 신선하고 바람직해 보인다. 그러나 희망의 신학의 인식론적 전제가 특별계시에 의존하고 있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말씀에 근거한 종말론적인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동시에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대망이다. 그런데 몰트만의 희망은 공산주의 철학자 블로흐의 사상에 근거하여,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인간소외와 경제적 착취가 없는 평화의 공동체 건설하는 것이 그의 희망이었기에 비판받고 있는 것이다.

 

 

1.3.2.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희망과 이머징교회운동

 

몰트만은 희망의 신학을 품은 교회의 사명을 사회적 책임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러한 몰트만의 사회적 관심은 그의 교회관에서 더욱 분명히 들어나는데, 교회는 희망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미래를 단순한 개인 구원의 차원에서 벗어나 실제적 변화와 사회적 개혁을 통해 이뤄 나가는 무리라고 규정했다.

김길성 교수는 몰트만의 교회관이 현대 교회에 녹아져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몰트만이 복음전파, 예배, 봉사 등과 같은 본질적인 사명보다 기독교인의 정치적 책임을 강조했듯이, 오늘날 교회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자체를 강조하기 보다는 오히려 주변 사회의 변화나 선교적 필요 등과 같은 문제들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교회의 본질보다는 기능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현대 교회의 문제점이라고 김길성 교수는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김길성 교수의 지적처럼 현대 교회는 더 이상 특별계시의 테두리에 묶여 있어서는 안 되고, 포스트모더니즘, 심리학, 실용주의, 마케팅 등의 다양한 방법을 소극적으로 고려하거나 적극적으로 동원해 불신자들에게 접근해야 하고 사회를 개선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예배, 기도, 성경공부, 전도의 영적인 부분 보다도, 문화, 정치, 복지 등의 사회적 책임에 더욱 능동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결과 일어나게 된 하나의 운동이 있는데 그것이 이머징교회운동(Emerging Church Movement)이다.

현재 한국교회는 이머징교회운동 논란으로 뜨겁다. 이머징교회란 ‘새로이 떠오르는 교회’ ‘신흥교회’ ‘신생교회’라는 뜻이다. 이 운동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는 교회의 시대적 한계를 타파하고자 2003년 샌디에고에서 첫 모임을 가짐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아직 정해진 틀이나 조직이 없다. 단지 교회부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표면적이든 이면적이든 찰스 피니(Charles Grsndison Finney)로부터 시작된 인위적 부흥관에 동의하면서, 미국의 새들백교회, 윌로우크릭교회, 레이크우드교회, 노스포인트교회, 펠로십교회들이 보여주는 인위적 방법론을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이머징교회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머징교회운동에 찬성하시는 분들은 이머징교회의 장점들을 이렇게 말한다. 첫째로, 시대정신을 잘 반영한 교회 부흥운동의 대안이라고 말한다. 이머징교회운동은 우리 주위를 둘러싼 문화를 읽어 내고 그런 해석이 우리의 복음 증거, 신학에 대한 이해, 목회자 직분, 심지어 우리의 자기 이해에 대해 갖는 함의를 충분히 생각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성도와 불신자의 적극적 참여와 경험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다고 말한다. 20세기 중반까지는 ‘국가의 시대’, 20세기 후반은 ‘기업의 시대’, 21세기는 ‘개인의 시대’라고 어떤 일간지에서 읽은 적이 있다. 현 시대는 ‘개인’의 가치가 어떤 이념과 기업의 이윤 창출 보다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사람들은 누구의 철학, 누구의 이윤 창출의 이용도구나 소모품으로 살아가는 인생은 더는 원치 않는다. 나의 개성, 나의 가치, 나의 개성, 나의 경험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의 자유로운 표출이 중요하다. 인터넷 상에서의 ‘싸이 월드’ ‘트위터’ ‘블로그’ 등에 적혀 있는 수많은 생각과 철학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러한 참여와 체험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부흥운동이 이머징교회운동이라는 것이다. 셋째로, 예배를 보는 입장이 아니라 참여하는 입장으로 드리도록 유도한다. 그래서 예배를 보고 들을 뿐 아니라 맛보고 냄새 맡으며, 만지고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을 도입한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노래, 침묵, 설교, 예술, 표현에 대한 훨씬 더 큰 스펙트럼으로의 이동을 포함할 수 있음을 말한다. 공연을 방불케 하는 화려한 무대장치와 뜨겁게 노래하며 박수치며 호흡하는 찬양, 토크쇼 연극 등을 접목한 설교 등은 참여에 목마른 청중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이머징교회운동은 장점보다 단점이 많은 위험한 운동이다. 첫째로 이머징교회운동은 예배의 주 대상을 구도자가 아닌 탈구도자 중심으로 맞췄다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예배의 기본이념인데, 부흥에 목말라 있는 현대 목회자들이 탈구도자들의 구미에 맞춰 예배드림으로 예배의 본질 자체를 흐려 놓아 버린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둘째로, 설교를 우리의 인생이라도 걸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예배 모임에서의 경험의 일부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설교자는 현대 생활 속에서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 진리를 나눠주는 역할을 할 뿐이지 취사선택은 개인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 이머징교회의 큰 문제점이다. 셋째로, 교회를 예배와 성경교육의 공간이 아닌 극장과 쇼핑몰로 변질시켜 버렸다. 초대교회 이후 전통적으로 교회를 지을 때는 예수그리스도를 기념하고 기억하기 위해 십자가 형태로 지었다. 교회 내부는 항상 엄숙하고 경건했으며, 예배와 성경공부, 기도, 그리고 식사를 통한 친교 외에는 다른 세상적인 요소들은 들어오지 못했다. 그러나 이머징교회운동을 하는 목사들의 실용적 사고는 탈구도자들의 구미를 맞추기 위해 종교적 상징물들을 감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 탈구도자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물건들과 시설들을 설치하였다. 새로 지어지는 교회 중 십자가 형태의 교회는 찾아보기 힘들다. 단지 쇼핑몰과 극장과 같은 형태의 교회만이 있을 뿐이다. 이제 더 이상 신비감과 경이감을 불러일으키는 교회는 없어진 것이다. 이것이 장사함으로 예수님께 책망 받은 예루살렘 성전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러한 이머징교회운동의 출발배경에는 부흥이라는 희망을 이루기 위해 이제는 성경을 인식론적 전제로 사용할 수 없고, 마케팅, 실용주의, 심리학, 신비주의 등을 인식론적 전제로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암묵적인 합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이머징교회운동으로 인해 양산(?)된 성도들은 함량미달의 성도들일 수밖에 없다. 이들이 함량미달의 성도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부흥이라는 희망을 이루기 위해 성경을 인식론적 전제로 삼지 않고 세상의 철학과 방법을 전제로 삼아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데만 열을 올린 교회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한국에는 가나안을 찾아 떠도는 가나안 성도들이 많다고 한다. ‘가나안 성도’란 크리스천으로서의 정체성은 지니고 있지만 교회에 출석하지 않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찾아 다녔듯 새로운 교회를 찾아 떠도는 이들을 뜻한다. 가나안 성도의 규모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다만 주위에서 교회 이탈자들을 종종 볼 수 있는 만큼, 적지 않은 수가 존재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원규 감리교신학대 교수는 그의 저서 ‘한국교회의 위기와 희망’에서 2004년 한국갤럽의 조사를 분석, “1984년부터 20년간 개신교에서 다른 종교로 개종한 숫자가 198만명, 개신교인에서 무종교인이 된 숫자가 560만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개신교인이었다가 교회를 떠난 인구가 무려 758만명에 이른다”며 “특히 교회를 이탈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남성, 젊은 층, 높은 교육수준의 사람들이 많다”고 지적했다. 또 2005년 ‘한국 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한미준)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 기독교인 중 11.6%가 스스로 신자라고 여기면서도 교회에는 출석하지 않고 있다. 이 조사에서 성도들의 교회 이전 경험률은 57.9%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나안 성도는 몰트만과 같이 희망을 추구하기 위해 성경이 아닌, 세상의 방법을 인식론적 전제로 삼은 한국교회가 나은 변질된 성도의 무리인 것이다. 이처럼 교회와 성도가 성경을 인식론적 전제로 삼지 않을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성도, 하나님이 예배 받지 않으시는 교회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1.3.3. 특별계시 의존신앙

 

헤르만 바빙크는 특별계시는 인류를 낙원에서부터 십자가까지 인도했고, 십자가에서 하늘 영광까지 인도할 안내서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류의 지식의 출처와 자원이 되는 특별계시를 의존하지 않고서는 계속되는 추측과 억측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바빙크는 특별계시와 미래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현재 사회적으로 기독교와 기독교의 특별계시가 문화와 미래의 발전에 중요한 요인이 되지 못한다고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바빙크는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이성과 판단, 방법 등으로 미래의 발전을 꾀한 진화론자, 사회주의자, 문화인 등 수 많은 개혁자들 또한 인간의 마음과 영혼의 욕구를 충족 시켜주지 못하고 있음도 알고 있다고 바빙크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바벨론, 이집트, 그리스, 로마시대의 문화처럼 현대사회와 미래의 문화가 황폐화 되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미래는 세계를 지배하고 관장할 수 있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특별계시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특별계시의 광채가 십자가의 복음과 함께 우리의 미래를 비춰줄 때 우리는 비로소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생명의 왕국으로 전진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박윤선 박사는 그의 저서 ‘성경신학’에서 인간은 자기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만 알게 된다고 특별계시 의존적 사색을 강조했다. 그 증거로 마태복음 11장 25절에서 27절을 인용하고 있다. 첫째로 25절에서 하나님은 천지의 주재이시니 절대적인 신이시고, 그분께서 지혜를 슬기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낸다 하셨으니 인간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어린아이처럼 겸손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27절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 주셨으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지 않고서는 절대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특별계시 의존적인 사색만이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 있고, 신앙생활을 바르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박윤선 박사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몰트만은 분명 세상의 지혜를 가진 슬기로운 신학자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하여 신학 하고자 하는 자세가 없었다. 그 결과 성경이 아닌 공산주의 철학사상에 의존하게 되었고, 잘못된 신학을 만들어내고 만 것이다.

이러한 일은 우리들에게도 얼마든지 연출되어 질 수 있다. 자신의 지혜와 슬기, 학문적 성과만을 믿고 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한다면 우리의 모든 노력은 결국 사탄의 전리품으로 빼앗기게 되고 말 것이다. 신학 함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성경을 대하는 시간과 열정, 순종의 마음 또한 깊어져, 성경을 인식론적 전제로 하는 자세를 유지할 때, 우리의 모든 노력은 결국 하늘의 상급으로 주어지게 될 것이다.

 

 

1.4. 몰트만의 인식론적 전제를 마치며

 

더 나은 미래의 희망을 위해 적극적으로 준비하자는 몰트만의 의도는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의도를 주장으로 담아내기 위해 특별계시를 인식론적 전제로 삼지 않고 막시스트의 이론을 인식론적 전제로 사용하여 극단적인 행동신학으로 이어지게 된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아무리 좋은 일도 잘못된 방법으로 실행되면 원래의 의도를 잃게 되어 있다. 절망의 시대에 희망을 제시하고자 했던 몰트만의 의도에도 이와 같은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천동설(天動說)이 이해하기는 쉬워도 진리는 지동설(地動說)이다.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론과 전제라고 해도 그것이 진리라면 끝까지 고수해야 하는 것이다. 희망을 제시하고 실천하게 하기 위해 공산주의 사상을 인식론적 전제로 삼은 몰트만은 어쩌면 쉬운 길을 선택한 어리석은 신학자라고 볼 수 있다. 우리들은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무시하고 배척하기 까지 해도 변함없는 진리인 특별계시를 유일한 인식론적 전제로 삼을 때, 주님 앞에 서는 진정한 마지막에 승리하는 승리자들이 될 것이다.

 

 

 

2. 결론

 

우리는 지금까지 특별계시를 인식론적 전제로 사용하지 않고, 개개인의 판단과 이성에 근거한 인식론적 전제를 가진 근,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신학방법론을 비판하면서 오늘날 그러한 인식론적 전제가 이어지고 있는 현상들을 살펴보았다. 17-18세기 계몽주의와 과학의 발전으로 금이 간 특별계시 의존적인 인식론적 전제는 칸트에 의해 무너졌고, 슐라이어마허에 의해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특별계시의 권위를 재정립 시키려던 칼 바르트를 중심으로 한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은 오히려 성경의 무오를 부정하는 것을 기정사실화 해 버렸고, 그 영향으로 19-20세기에는 각자의 인식론적 전제를 바탕으로 한 여러 종류의 급진적인 자유주의 신학들이 나타나고 말았다.

서철원 교수는 19세기 신학은 칸트의 철학으로 조성되고 표현된 신학이고, 20세기의 신학은 칸트의 철학에서 실존주의의 철학으로 신학이 표현된 시기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20세기 신학은 19세기 신학의 연장선상이 있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두 시대가 동일하게 성경의 초자연적인 것들을 부정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초자연적 현상들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이 주류를 이루는 시대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자유주의 신학이 지배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떠한가? 특별계시를 인식론적 전제로 삼지 않고 선택과목 정도로 취급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목회한 교회의 현 주소는 어떠한가? 교인들은 떠나고 교회는 유지할 비용이 없어 문을 닫거나 다른 용도로 변경이 되어 팔려 버리고, 심지어는 이슬람 사원, 힌두교 사원으로 바뀌는 상황에 처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별계시를 인식론적 전제로 삼지 않은 교회들이 이렇게 몰락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요한복음 14장 21절 말씀에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믿고, 지키는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고, 예수님이 나타나는 교회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특별계시를 인식론적 전제로 삼지 않는 교회들은 하나님의 사랑도 받지 못하게 되었고, 예수님도 나타나지 않는 교회가 되었으니 당연히 문을 닫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특별계시만이 기독교의 유일한 인식론적 전제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메이첸은 자유주의신학을 카톨릭보다 더 기독교적이지 않은, 타종교에 가깝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정통신학은 특별계시를 중심으로 특별계시의 초자연 현상을 인정하는 전제를 가지나, 자유주의신학은 이성을 중심으로 초자연 현상을 불인정하는 전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라기보다 헬라철학의 아류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칸트에 의해 넓어진 이성의 영역은 헤겔에 의해 절대적인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포이엘 바하를 통해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존재가 되었고,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은 신정통주의 신학에 의해 진리인 특별계시는 세상에서 실종되고 실존이 경험한 주관적 판단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일어서야 한다. 눈이 빠져 앞을 보지 못하는 삼손과 같이 된 교회의 모습이지만, 하나님을 의지해 과거보다 더 많은 블레셋 사람을 죽인 삼손처럼 특별계시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만이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교회가 심판의 때 주님 앞에까지 무사히 안착(安着)하게 될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환경적인 요인들은 끊임없이 변한다. 그런데 환경적인 요인들 중 자신의 이성적 판단과 지혜에 근거하고, 철학적 논리를 사용하여 그것이 인식론적 전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 인식론적 전제는 언젠가 무너질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세상 모든 것은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진리가 없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삼위 하나님과 삼위 하나님이 우리에게 남기신 특별계시이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 하나님과 특별계시는 진리가 된다. 이 진리를 우리의 인식론적 전제로 삼는 것은 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특별계시가 인간에게 100%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도, 겸손한 마음과 자세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늘날 성도들은 특별계시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TV 뉴스와 이웃 사람의 조언에 더 귀를 기울이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성도들에게 먼저 특별계시를 중요시 하고 자주 접하게 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이나 세상적 판단과 특별계시의 견해가 부딪힐 때, 성도들이 특별계시를 의존하여 판단하도록 훈련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교회는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건강하게 유지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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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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