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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 그래도 도전해야할 사회개혁

주전담백 主前淡白 2008. 6. 9. 06:56

 

 

 

 

1. 머리말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을 맡기셨다. 청지기로 이 세상을 잘 다스릴 것을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이다. 그런데, 어느순간 부터인가, 인간은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포기한 체 "노숙자"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회가 열어주는 기득권에 배불러 하고, 만족하는 무뇌아가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인류가 세상과 멀어지게 된 계기가 언제일까? 내 생각엔 말라기 이후 400년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으신 그 시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 시기에, 불교, 도교, 유교, 이슬람교 등 세상의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종교들이 종교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철학, 의학, 수학 등 세상 학문들이 그 당시에 정립되기 시작해서이다. 그 때서부터 잃어가던 세상 기득권을 이젠 거의 마귀와 마귀정부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종말이 오려면 용이 666의 인을 받은 짐승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그 짐승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했던가? 이제 666의 인을 받은 짐승과 음녀가 지배하는 세상이 거의 다가왔나보다. 이젠 노골적으로 기독교와 하나님을 비방하는 세상 종교와 지도자들이 속출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이젠 기회가 지나간 걸까? 기독교인들이 정치에 참여하기만 하면, 정부에 참여하기만 하면, 타락에 길로 접어드니 말이다. 이젠 기독교가 사회를 개혁하는 일은 물건너 갔단 말인가? 우리는 이제 조용히 앉아서 우리 신앙 지키는 일에만 매진해야 한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회개혁에 앞장서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님이 주신 청지기 사역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럼 지금부터, 근∙현대사에서 기독교가 사회개혁에 열성적이었다 멀어지게된 과정을 살펴보고, 어떻게 하면 우리의 책임에 다시 도전할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해 보길 원한다.


2. 개혁주의적 복음주의자들의 노력과 성취, 그리고 타락

칼빈은 복음주의자를 세부류로 나누고 있다. 육체와 세상을 무시하고 영만을 중요시하는 [이원론적 복음주의자]와,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지만, 복음전도라는 소극적 방법으로만 가능하다고 믿는 [개인주의적 복음주의자], 그리고, 복음전도라는 방법 외에도 사회참여라는 적극적 방법을 통해 사회개혁을 이뤄야한다고 주장하는 [개혁주의적 복음주의자]가 있다. 이 세부류를 아무런 선입견 없이 보면, 어떤 부류가 옳은 것인지 분명히 나온다. 우리는 기도와 자선을 통한 온전한 신앙생활도 열심이어야 하지만, 그것을 통해 [개혁주의적 복음주의자]가 되어 이 세상을 바르게 해야할 청지기적 사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인들과 선교사들은 이 사명에 충실했다. 선교사들은 황실에 협조적이었고 사회개혁과 근대화에 열심이었다. 이에 자극을 받은 기독교인들은 개화와 독립이라는 두 영역에서 나름대로의 열심을 품고 [개혁주의적 복음주의자]의 길을 열심히 걷고 있었다. 그런데, 이 대열에서 먼저 이탈하게 된 것은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은 1901년 “교회와 정부 사이에 교제할 몇 조건”이라는 것을 만들어 한국의 정치에 관여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이 중, 헐버트만이 유일하게 조선과 함께 해 주었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이 탈 정치화의 색깔을 띄긴 했으나, 선교사들의 배신을 뒤로하고, 3∙1운동 참여와 신사참배 반대 등을 통해 기독교인들은 [개혁주의적 복음주의자]의 길을 충실히 걸어갔다.

이런 기독교인들을 일본정부는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래서 평안도 지역의 기독교인을 숙청했던 ‘105인 사건’이 터졌고, 신사참배 반대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천주교와 감리교가 먼저 손을 들었고, 23개 노회 중 17개가 손을 들더니, 결국 모든 노회는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규정하고 따르게 된다. 일부 집단과 개인만이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심한 옥고를 치르게 된다.

드디어 광복이 찾아왔다. 일제시대, 수동적이었던 대부분의 국민들과는 달리, 적극적이었던 기독교인들은 신속히 정부요직을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이승만 장로는 실리를 위해 행정경험이 풍부한 친일파를 중용하였고, 헌법개정과 같은 도덕적 무리를 일으키다 결국 1960년 4.19일에 무너지게 된다. 그리고, 제2공화국의 우유부단함을 틈타 형성된 제3공화국에 기독교인들은 처음엔 찬사를 보낸다. 그러다가 [한일국교정상화] 때, 잠시 [개혁주의적 복음주의자]의 모습을 띄다가, [삼선개헌]과 [유신헌법]에 대해 친정부적인 목소리를 내게 되고, 도리어 그런 행위를 “반공적 행위”라 하여 [기독신보]는 찬양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개혁주의적 복음주의자]임을 포기한 암흑기를 지나,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서경석 목사, 손봉호 교수와 같은 사람들로 부터 시작해서 다시금 [개혁주의적 복음주의자]의 모습을 찾아가려고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번 무너진 마음은 회복되기가 어려운 걸까? 지금까지도 한국교회는 사회 속에서 온전한 [개혁주의적 복음주의자]의 모습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3. 어떻게 하면 우리 본연의 임무를 회복할 수 있는가?

이렇게 해서 무너져버린 우리의 모습은 쉽게 회복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과거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1%가 안되는 사람들만 가지고도 어떻게 임무를 실행하고 도전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첫번째로, “확고한 신앙심”이라고 생각한다. 열정있는, 순수한 선교사들을 통해 오염되지 않은 복음을 접한 신앙의 선배들, 그들은 그 순수한 복음의 열정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망을 그대로 가슴에 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실천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임무를 실행코자 몸부림을 쳤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개혁주의적 복음주의자]로 회복되기 위한 첫번째 열쇠가 여기에 숨어 있다. 그것은 “순수한 신앙심” “확고한 신앙심”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대로 믿고, 그 주님의 말씀대로 실현 될 것임을 확신하는 정신이 박혀 있을 때 우리는 겁없이 담대하게 세상 속에서 [개혁주의적 복음주의자]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둘째로, 과거 신앙의 선조들에게는 “적당한 고난”이 있었다. “적당한”이라는 말을 붙히는 것이 좀 부자연 스럽기도 하지만, 과거 카타콤과 갑바도기아의 신앙인들에 비하면, “적당한”이란 표현이 맞을 것이다. 과거 신앙의 선조들은 적당히 배고팠고, 적당히 사회적 기득권을 갖지 못했고, 적당히 고난을 당했다. 그 결과 이들은 그 고난으로 인해 주님을 더욱 찾게 되었고, 주님이 원하시는 뜻을 온 맘 다해 실천하게 된 것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거창고등학교]라는 학교 정문 옆 벾에는 여러가지 역설적 교훈이 적혀 있다고 한다. 그 중에서 “돈을 적게 주는 곳이면 그곳을 선택하라”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어찌보면 말이 안되는 것 같지만, 참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진리가 아닐 수 없다. 오늘날 교회가 세속화 되다 보니, “교회 내에서도 주일날 공부하더라도 좋은 대학 가야 한다. 주일날 일을 하더라도 돈 많이 벌어야 한다. 적당히 거짓말하고 탈세하고, 로비하더라도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한다”라는 생각이 공개적으로는 아니지만, 은연 중에 공인되고 있지 않은가? 이런 교회의 현실 속에 고난이란 말은 옛말이 되고 말았다. 더 이상 우리에게 고난은 반가운 손님이 아닌, 버릴 순 없고 가까이 할 순 없는 “계륵”과 같은 존재 “뜨거운 감자”와 같은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개혁주의적 복음주의자]로 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방해물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서 나는 한가지 제안하고 싶다. 세상의 출세를 강조하기 전에, 하나님과 교회, 이웃에게 충성하는지를 점검해 보기를 바란다. 만약 자신의 출세와 앞의 세가지가 충돌될 경우에는 과감히 주님의 길을 택하길 바란다. 그러할 때 우리에게 오는 것이 바로 고난이다. 하지만, 내가 잘못해서 겪는 고난도 아니고, 나를 무너뜨리는 고난도 아니기에 결코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주님은 그 고난을 통해 나를 더욱 더 강하게 만드시고, 세상이 부러워 할 만큼 풍족하게 하시며, 세상이 따르고 싶을 만큼 존경스러운 사람이 되게 하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친구처럼 여기려는 생각! 이것이 진정한 [개혁주의적 복음주의자]로 가는 지름길이 아닌가 생각된다.


4. 맺음말

우리는 과거 “순수한 신앙심”과 “고난”을 발판으로 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청지기의 사명을 잘 감당하였다. 하지만, 짧지만, 긴시간이라고 볼 수 있는 기간 동안, 주님과 세상 앞에서 신뢰를 잃을 행동들을 하고 말았다. 그 원인은 아까도 말했고, 앞에도 나와 있듯이 “순수한 신앙심”의 부제와 “고난”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인의 사회참여가 활발해져 있고, 정치, 정부각처에 기독교인이 넘쳐나지만 교회와 하나님은 오히려 그들로 인해 지탄을 받고 있는 형국이다.

우리는 “순수한 신앙심”을 회복해야 한다. 이 일에는 왕도가 없다. 매일 말씀 읽고, 기도하고, 교회와 이웃에 봉사하며, 전도해야 한다. 이 가운데,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같은 삶을 누리기를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고난을 동무로 여겨야 할 것이다. 그러할 때, 역설적 진리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개혁주의적 복음주의자]로 만들어 주시고, 세상을 바르게 돌려놓는 매개체로 사용하실 것이다. 이 일에 모든 기독교인, 특별히 목회자들이 쓰임받기를, 내가 쓰임받기를 원한다.

 

 

  <참고문헌>


  -양낙흥, 개혁주의 사회윤리와 한국교회 (1999) 개혁주의신행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