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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성령충만에 대한 책 비교, 비판

주전담백 主前淡白 2008. 6. 9. 15:47

 

 

 

 

“성령세례와 충만” (존스토트)

 
1. 도전 받은 점

첫째로 [제2판 서문]에서 밝힌 그의 태도이다. 존 스토트는 극단을 경계하면서 “어떤 입장을 취하든지 간에 서로 풍성한 교제와 대화를 지속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우리와 같은 보수주의 교단에서 본받아야 할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목사님께서 한신교회 이중표목사께 “기장측의 신학을 바꿔볼 의향이 없으십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목사님은 “모두가 비슷해서는 안돼지. 어떤 사람은 민중을 어떤 사람은 여성을 어떤 사람은 소외계층을 위한 신학을 하게도 해야지. 오히려 내가 기장의 이단아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우리는 너무 경직된 사고로 모든 경우를 제단하려고 하는데, 이는 탈피해야 할 모습이 아닌가 생각한다.

둘째로 성령충만의 증거를 네가지로 드는 부분에서 성령충만에 대한 나의 자세를 돌아보게 되었다. 존 스토트는 성령충만의 네가지 증거를 “사랑”, “찬송”, “감사”, “교제”로 이야기 한 후 이를 줄여 “예배와 교제”로 정리하고 있다. 우리는 기존에 은사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서 성령충만을 개인적인 필요를 채우는 능력부여 쯤으로 은연중에 생각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성령충만을 구할 때면 자신에게 큰 문제가 있거나 자기 힘으로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를 위해 구할 때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존 스토트 목사는 성령충만으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성도간에 교제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통해, 우리가 구하는 성령충만의 잘못된 모습을 알게 되었고, 그것으로 인해 성령충만이 실현되지 않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셋째로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세가지 부류, 즉 하나님과 맺는 관계(사랑, 희락, 화평), 타인과 맺는 관계(오래참음, 자비, 양선), 자신과 맺는 관계(충성, 온유, 절제)로 나눠 놓은 부분도 매우 새롭고 인상적이며 도전적인 내용이었다.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도 보통 분류하지도 않고, 그저 각각의 열매의 의미를 살피는 것이 보통인데 이렇게 항목화 하여 분류하니 성령의 열매가 맺어져야 하는 의도와 성령의 열매의 성격을 확실히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성령의 열매가 하나님을 위해, 타인을 위해, 그리고 나를 단련하였을 때 맺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성령의 열매도 나를 위한 것이기 보다 하나님과 남을 위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2. 개혁주의 입장에서 비판

존 스토트 목사가 주장하는 ‘성령세례’, ‘성령충만’, ‘성령의 열매’ ‘성령의 은사’는 모든 부분에서 개혁주의 입장과 동일하다고 보여진다.

단지 미묘한 차이를 찾자면 ‘성령충만’에서 세례와 함께 성령이 임하여 떠나지 않는 것은 일치하지만,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성령충만이란 어린아이의 폐와 어른의 폐가 다르듯이 상대적인 차이가 있을 뿐 물리적인 증가나 감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데, 존 스토트 목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잃어버리는 것이 가능하며 또 애석하게도 그것이 흔한 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에서 말하고 있듯이 성령충만을 양적인 개념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성령세례”
 
(D.M.로이드 존스)


1. 도전 받은 점

첫째로 성령체험에 대한 그의 열정에 도전을 받았다. 로이드존스 목사는 성령체험은 힘써 구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162p) 성령체험은 즉흥적으로 얻어지는 것 또한 아님을 말함으로(165p) 성령체험을 힘써 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박영돈 교수님께서 수업시간에 “성령체험을 가장 중요한 갈망의 대상으로 놓아야 한다.”(11.15일 수업)는 말씀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 삶의 우선순위에 성령충만을 놓지 못하고 있고, 성령충만을 위해 버려야 할 것들을 아직 버리지 못한 내 자신이 매우 부끄러웠다.

둘째로는 은사전달(189p)에 대한 그의 의견에 도전을 받았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받는다’는 의미는 취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능동이 아닌 수동의 의미임을 강조하면서(190p) 성령의 은사는 주님의 선물이지 취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195p) 이 부분이 로이드 존스 목사가 오순절 계통과 유사하면서도 차이나는 부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오순절계통에서는 은사를 개인의 능력향상을 위해 받고 이를 개인적으로 사사(私事)할 수 있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고, 이는 은연중에 한국 교회를 잠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와중에서 은사는 철저하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고 내 임의로 전달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각인시키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셋째로, 성령충만에 대한 로이드존스 목사의 자세 중 도전 받은 것은, 성령충만을 구하기 보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갈망하는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점(200p)이다. 많은 신앙인들이 성령을 부리는 영 쯤으로 생각하고, 예수님을 사랑해야 할 대상, 인격적인 교제의 대상이 아닌, 구속과 중보의 도구로만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의 목적을 위해 성령과 성자를 이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그분을 사모하고 그분과 동행하려 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는 그것이 결국 성령충만임을 밝히는 부분이 매우 도전 되었다.


2. 개혁주의 입장에서 비판

이 책의 역자(譯者)는 서문에서 로이드존스를 개혁주의 성령론과 오순절 계통의 성령론을 잘 결합한 목사라고 칭송하고 있다. (11p) 그런데 네가 보기에는 오순절 계통의 성령론에 많이 치우치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개혁주의 입장과 가장 큰 차이점은 성령세례가 중생의 순간에 이뤄지지 않는 것으로 본다는 점이다. 성령으로 세례 받는 일이 필연적으로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며, 같이 일어날 수도 있고 안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31p) 이는 예수를 영접하고 중생하는 동시에 성령세례를 받게 되어 그 사람의 상태에 맞는 성령충만을 경험하게 된다는 개혁주의 입장과 정 반대되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둘째로, 성령 세례를 이야기 하면서 순수한 성령세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부흥과 관련하여, 성령세례를 수단화 시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즉 성령 세례를 부흥의 도구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상은 책의 처음부터 끝 까지에 걸쳐 편재(遍在)되어져 있다. 이는 오순절계통에서 성령세례를 통해 획기적인 변화를 하여 교회가 변화되고 성도가 헌신하게 된다는 주장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셋째로, 이 책이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예를 드는 것의 비중이 성경보다 과거 사건들이 많다는 점이 존스토트 목사의 성령세례에 대한 논리전개 모습과 큰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를 들고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요한 웨슬레, 찰스 피니, D.L. 무디 등 대표적인 오순절 계통의 2차 성령세례주의자들이라는 것이 개혁주의 성령론과 대치되는 증거라고 생각된다.

넷째로, 성경의 근거를 들어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보다 확신(38p), 뜨거움(57p), 임재의식(86p), 기쁨과 환희(100p) 등 주관적 경험을 근거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증거를 삼고 있다. 존스토트 목사는 성령충만에 대한 인식은 ‘지식-믿음-경험’의 순으로 이뤄진다고 말하고 있다([성령세례와 충만] 75p) 이를 비교해 볼 때, 로이드 존스 목사의 견해는 개혁주의 성령론에서 많이 멀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끝으로 로이드 존스 목사는 오순절 성령체험이 오늘날도 반복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265, 276p) 그러나 오순절 성령체험은 단회적인 것이고, 우리는 오순절에 오신 성령의 인도와 주장을 받고 사는 것이라는 개혁주의 성령론의 입장과 너무나도 다른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맺음말

로이드존스 목사의 성령론을 읽으면서, 개혁주의 입장에서 비판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난도질 하기는 했지만, 부흥을 갈망하는 그의 열정과 오늘날 나타나는 성도들의 모습을 볼 때 로이드 존스 목사의 견해에 상당부분 공감하기도 했다. 요한 웨슬레가 칭의에만 의존하여 삶을 방탕하게 허비하는 사람들 앞에 행위를 강조한 것처럼 로이드 존스 목사도 분명 개혁주의 입장에서 성령론을 봐야 함을 알면서도 현상이 그렇지 못한 것을 보면서 그 딜레마를 매우려고 하다 보니 이런 어정쩡한 성령론이 나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들도 로이드 존스 목사와 같은 고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까 우리는 이렇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식으로만 간다면 우리는 현실과 점점 멀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공상과학영화에 등장하는 영웅들처럼 오순절 계통의 주장처럼 2차적인 성령세례를 받아 능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을 가져서도 안 될 것이다.

이런 가운데서 내가 내린 결론은 ‘갈망’이다. 이는 존스토트 목사도, 로이드 존스 목사도, 박영돈 교수님도 동일하게 주장하는 바이다. 성령세례가 중생과 동시에 일어나거나 2차적인 성령세례를 통해 일어나는 것을 논쟁하는데 집착하지 말고, 성령충만을 갈망하는 자세에 집중하는 것이 옳은 자세라고 생각한다. 로이드 존스나 존스토트 모두가 성령충만은 수동적인 것이라고 밝힌 것 처럼, 우리는 성령충만을 갈망해야 할 것이다. 그 가운데 주님이 주시는 성령충만을 경험하여 더 발전된, 향상된 신앙생활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우리 삶의 우선순위를 두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