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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예배지침 관련 글

주전담백 主前淡白 2011. 7. 14. 07:23

 

 

 


 

 

1. 예배의 4대 요소를 말하세요.

 

예배의 4대 요소에는 찬양, 기도, 설교(말씀), 예물(헌금)이 있다.

예배의 요소 첫 번째는 찬양이다. 찬양이란 무엇인가? 찬양이란, ‘시’, ‘기도’, ‘영적인 노래’의 형식을 가진 노래로 하나님을 경배하거나 선포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러니까 찬양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왜 찬양해야 하는가? 첫째로 인생 창조의 목적 찬양이기 때문이다. 이사야서 43:21에 따르면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둘째로 하나님은 찬송 중에 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령은 찬송 중에 임재하시며 찬송 중에 역사하신다. 셋째로 하나님은 살아계시신 분이시기에 찬양해야 한다. 삼하 22:47을 보면, 다윗은 그의 모든 대적을 하나님께서 물리치게 한 후에 여호와를 찬송하였는데, 그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그의 구원의 바위가 되어 주신 것을 찬양하였다. 이처럼 우리가 찬양하여야 할 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고, 삶의 필요를 채워 주시며, 삶에 평화와 평안을 주시고, 말씀으로 행하신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기에 찬양해야 한다.

예배의 요소 두 번째는 기도이다.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요, 영혼의 호흡이며,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 자신에게로 끌어들이는 통로이다. 기도는 하나님이 자신의 자녀들과 관계를 유지하는 대화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가지는 최대의 특권인데, 우리는 성경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며, 그 말씀에 우리의 영혼이 신앙하고 희망하며 경배하고 찬양과 감사를 드리며 탄원과 간청으로 응답하는 대화가 바로 우리의 기도인 것이다.

예배의 요소 세 번째는 설교이다. 헌법 예배지침 4장 19조에 보면, “설교는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하나님의 방편”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예배의 순서 중 가장 중요한 순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각별히 주의하여 설교해야 한다. 설교할 때 주의해야 할 것에는 무엇이 있는가? 첫째로 무엇보다 성경 속 인물이 아닌 그 인물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성도들이 사모하도록 한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주로 설교해야 한다. 설교를 듣는 성도 중 많은 이가 구원의 길을 찾고 있는 구도자(求道者)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설교해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므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설교를 통해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 네 번째 요소는 예물(헌금)이다. 헌금이란 우리 자신의 삶과 생활을 하나님께 드리는 의미로 바치는 예물을 뜻한다. 그래서 헌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기쁨과 실패. 평안과 불안, 생명과 죽음)들에 대하여 감사함으로 드려야 하며, 마지못해서나 조건부의 심정으로 드리는 것은 온전한 헌금이 아니다. 헌금을 드리는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첫째로 미리 준비하여 정성껏 드려야 한다. 둘째로 정당하게 벌어드린 물질로 드려야 한다. 셋째로 남은 것이 아니라 처음 것을 드려야 한다. 넷째로 남의 것이아니라내것으로,남의손이 아닌 내 손으로 드려야 한다.



2. 가인의 예배와 아벨의 예배를 논하세요.

 

1) 서론

 

창세기 4장에는 가인과 아벨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가인이라는 이름의 뜻은 ‘얻음’이다. ‘얻음’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은 이 아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아벨의 뜻은 ‘하찮음, 무의미, 한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죄의 결과로 힘든 삶을 살다가 나은 아들이다 보니 이름을 이렇게 지은 것이라 생각된다.

가인과 아벨은 각각 다른 일을 했다. 가인은 농사를 지었고, 아벨은 양치기가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부모가 한 것처럼 각자 자기가 일을 해서 얻은 그 열매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예배는 받으셨는데,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신 것이다.(창4:4-5) 그 결과 화가 난 가인은 아벨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첫 번째 살인자가 되게 된다. 하나님은 왜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셨던 것일까?

 

2) 본론

 

(1) 아벨의 예배를 받으신 이유

 

왜 하나님께서 아벨의 예배는 받으셨고,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셨을까? 창세기 4장만 봐서는 그 해답이 불분명하다. 그러나 히브리서 11장 4절 말씀을 보면 그 해답을 짐작할 수 있다. 히브리서 11장 4절을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벨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것이다. ‘믿음으로’라는 말이 뜻하는 것은, 자신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에 의해 주어진 것이란 믿음으로 드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이 있었기에 아까워하지 않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벨의 예배를 기뻐 받으신 것이다.

 

(2)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으신 이유

 

반대로 가인은 하나님께 믿음으로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는 가인은 아벨과 다르게, 자신의 소산물이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하심에 의해 얻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수고와 노력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믿음이 없었기에 가인의 예배에는 자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지 않은 형식적인 예배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으신 것이다.

 

(3) 진정한 예배란 어떤 예배인가?

 

헌법 예배지침 1장 1조에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자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대표적인 행위”라고 기록되어 있다. 가인과 아벨의 예배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예배의 모습을 확인해 봐야 한다.

진정한 예배란, 첫째로 하나님께 믿음으로 드려야 한다. 믿음이 없이 드려지는 것은 아무리 정확하게 그 의무를 행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지해서,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다는 믿음, 내 삶의 주인은 주님이시고, 생사화복은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믿음, 결국 나는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하늘나라에 이를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바탕이 된 가운데서 예배드릴 때, 하나님이 받으시는 진정한 예배가 되는 것이다.

둘째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형식적인 것과 의무감에 따라 드리는 것은 받지 않으신다. 진정한 예배란 스스로 우러나서 하나님을 진정 높이는 마음으로 드려야 하는 것이다.

 

3) 결론

 

우리는 가인과 아벨의 예배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점검해야 한다. 우리들의 예배는 형식적인지 아닌지 점검해야 한다. 진심으로, 우러나와서, 하나님을 자발적으로 높이고 싶은 마음에서 예배드리고 있는지 점검해 봐야 하는 것이다. 둘째로 아벨의 신앙처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왔는지 아니면 가인처럼 믿음 없이 하나님 앞에 나왔는지 점검해 봐야 하는 것이다. 그러할 때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큰 은혜가 임하는 영적 라마나욧의 장이 될 것이다.

 

 

 

3. 현대 열린예배와 개혁주의 예배를 비교하고, 현 시대에는 어떤 예배가 합당하다고 보는가?

 

1) 서론

 

요즘 많은 한국교회의 예배 형태가 열린예배 형태화 되었다. 미국에서 시작된 열린예배는, 예배를 TV 쇼프로그램처럼, 각본을 짜고, 화려한 무대와 조명, 최고의 음향시설을 갖추고 한 시간 즐겁게 즐기도록 하는 것이다. 지금은 우리 한국교회에도 급속도로 보편화되어 가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와 참된 신학이 약한 한국교회의 많은 목회자들은 성경을 통한 비판력을 상실한 상태로 무분별하게 그것을 교회에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열린예배를 사랑의 교회나 온누리 교회와 같이 한국교회를 선도하는 대형교회들이 하고 있는 것을 보증삼아, 사람들이 많이 몰려온다는 장점 때문에 무분별하게 도입하고 있는 실정이다.

열린예배는 합당한 예배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드리고 있는 개혁주의 예배에 문제가 있다는 말인가? 열린예배와 개혁주의 예배를 비교해 보고, 현시대에 필요한 예배에 대해 논해 보도록 하겠다.

 

2) 본론

 

(1) 열린예배의 개념과 형태 (새들백 교회의 열린예배를 중심으로)

 

새들백 교회(Saddleback Church)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오렌지 카운티, 레이크 포레스트에 위치하고 있는데, 릭 워렌 목사가 1980년 부활절에 개척하여 크게 부흥시켜 현재 등록교인 8만5천명의 대형교회가 되었다.

새들백 교회

새들백 교회는 건물구조 자체가 열린예배를 위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새들백교회의 구조는 대형 극장을 연상케 한다. 즉, 하나님께 경건함으로 예배드리기 위해 모이는 성전이라기보다는 마치 연극을 편하게 구경하기 위해 모이는 극장과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 새들백교회는 강단을 연극무대처럼 만들었다. 그 이유는 강단을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기 위함이다. 다시 말하면 강단을 필요에 따라 각종 연주회, 현대 복음송, 기독교 록음악, 춤, 연극, 오페라 등을 위한 무대로 전환하기 위함이다. 새들백교회의 강대상은 나무로 만든 작은 볼품없는 강대상이다. 강대상을 작은 이동식 탁자로 대체한 것이다. 그 이유는 바퀴를 달아서 목적에 따라 수시로 쉽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성도들의 의자는 등 받침이 없는 술집 같은 곳에서 사용하는 다리가 긴 의자(stool)같은 것을 놓고 청바지에 가벼운 상의를 입고 걸터앉을 수 있게 해 놓았다.

 

릭 워렌 목사

열린예배는 형식 자체가 없다. 릭워렌 목사는 예배 형식에 매이지 말고, 목사, 안내하는 사람, 성가대 모두 청바지나 또는 가벼운 옷들을 입으라고 말한다. 둘째로 기타, 드럼, 키보드 등 현대적인 것은 모두 사용하라고 말한다. 셋째로 예배는 어떤 부담이나 강요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강단은 절대로 강단 같이 보이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새들백 교회의 예배순서는 TV쇼나 공연과 유사하다. 예배 시간이 시작되면 사회자의 간단한 환영의 인사말 후에 화려한 연주와 함께 찬양이 시작된다. 새들백 교회의 예배 인도자인 릭 무쵸 (Rick Mucho)목사의 인도로 경쾌하고 밝은 현대적 음악으로 만들어진 찬양들이 불려지며 때에 따라 40~50명의 성가대가 함께 찬양을 한다. 이 교회에서 불려지는 찬양들은 대부분 릭 무쵸 목사를 비롯하여 이 교회 성도들이 스스로 만든 찬양들이 많다. 때로는 전통적인 찬송가들을 부르기도 하는데 물론 이 때는 현대적 음악 스타일로 편곡된 연주가 곁들여지게 된다. 15분 정도의 찬양이 끝나고 나면 담임목사님의 설교가 시작된다. 커다란 대형화면을 통해 설교의 내용이 요약된 문장과 성경구절이 비춰지게 되며 간단한 예화 같은 내용을 담은 동영상도 설교 내용에 따라 준비되어 있다. 그리고 예배 중간 중간에 성도의 간증이 곁들여 지기도 한다. 설교가 끝난 뒤 사회자가 헌금봉투와 함께 놓여 있는 메모 카드를 보이면서 처음 방문한 이들은 새가족등록카드를 쓰도록 권유하며, 기존 성도들에게는 기도요청 내용, 심방요청, 자원봉사 신청 등의 여러 가지 내용으로 사용하도록 인도하였다. 그 메모 카드의 명칭은 ‘커뮤니케이션 카드’였으며 그 이름 그대로 예배에 참석한 이들과 교회가 서로 필요한 정보를 나누는 도구였다.

새들백 교회의 열린예배는 예배가 갖춰야할 진정한 요소들은 거의 없다. 첫째로 새들백 교회는 죄를 고백하는 기도로 예배를 시작하지 않는다. 둘째로 새들백 교회는 경배찬송은 물론, 교리적인 찬송, 복음찬송과 같이 순서마다 하나님께 올려야 하는 찬송이 없다. 단순히 성도들의 귀와 눈을 즐겁게 해 주고, 현대적 감각에 뒤떨어지지 않는 노래들만이 있을 뿐이다. 셋째로 새들백교회는 신앙고백이 없다. 사도신경의 고백의 순서가 없다. 넷째로 설교에 복음의 핵심이 없다. 설교에 복음의 핵심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서의 고난, 주의 보혈, 대리적 속죄의 죽음, 육체적 부활, 재림, 최후 심판, 구원 영생과 지옥 형벌, 죄를 책망하는 회개, 영적전투, 성별(聖別)된 생활 등의 내용이 없다. 그의 설교는 인본주의에 입각한 심리학, 상담학, 교회성장(외형적) 등에만 골몰한다. 다섯째로 송영찬송과 축도가 없다. 송영 은 송영의 대상자이신 하나님께 애모․동경․찬양․감사․영광을 돌리는 예배 행위로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축도는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사람 곧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종이 하나님의 복들을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 한 사람 한 사람 위에 임하기를 간절히 간구하는 동시에 귄위 있게 선포하는 것으로 빠져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없다.

새들백 교회는 예배의 시간도 파괴해 버렸다. 새들백교회에서는 믿는 자들을 위한 예배는 수요일 밤에, 구도자 중심의 예배(열린예배)는 토요일과 일요일 아침에 실시한다. 예배를 토요일 오후 4:30과 오후 6:30에 그리고 일요일 오전 11:15에 실시한다. 그는 자신이 말한 대로 예배시간을 그렇게 정한 이유는 교회 참석자들의 견해와 요청에 의한 결정이라고 한다.

 

(2) 개혁주의 예배의 개념과 형태

 

개혁주의 예배란 어떤 것인가? 헌법 예배지침 1장 1~2조에 보면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자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대표적인 행위이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므로 신자들은 언제 어디서든지 예배할 수 있으나 특별히 성별된 장소에서 주님이 부활하신 주의 날에 함께 모여 공동으로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기록되어져 있다. 이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예배는 성별된 공간, 특히 경건하면서도 정숙한 공간에서 드려진다는 것이다.

개혁주의 예배에서는 예배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헌법 예배지침 2장 5조에 보면 “주일 성수는 제 4계명이 가르치는 대로 거룩히 지키되 사전에 성실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충분히 준비하여 공동 예배에 하나님과 교제함이 있도록 해야 한다. 일용할 음식물까지라도 미리 준비하여 공식예배와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일에 일체의 거리낌이 없도록 해야 한다.”라고 기록되어져 있다. 이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예배는 아무 준비 없이 편한 마음과 편한 복장으로 드려도 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고 성실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개혁주의 예배에는 순서가 있는가? 순서가 있다. 헌법 예배지침 3장 8조에 보면 “교회의 예배의식은 개체교회의 권위로 작정하는 것이나 그 기본적인 순서는 다음과 같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면서, 아래의 예배순서를 권하고 있다.

1) 기도 (행6:4 ; 딤전2:1)

2) 찬송 (골3:16; 시9:11; 엡5:19)

3) 성경봉독 (행15:21; 눅4:16~17)

4) 성경해석과 설교 (딛1:9; 행9:20;10:42; 눅24:47; 딤후4:2)

5) 세례 (마28:19~20; 막16:15~16)

6) 성찬 (고전11:23~28)

7) 금식과 감사 (눅5:35; 빌4:6; 딤전2:1; 시50:14, 95:2)

8) 성경문답 (히5:12; 딤후3:14~17)

9) 헌금 (행11:27~30; 고전16:1~4; 갈2:10;6:6)

10) 권징 (히13:7; 살전15:12~13; 고전5:4~5; 딤전1:20; 5:12)

11) 축복 (고후13:13; 엡1:20)

이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예배는 철저하게 성경에 근거하여 순서를 정해 하나님께서 받으시기 합당하게 드린다는 것이다.

 

(3) 현 시대에 합당한 예배

 

그렇다면 현 시대에는 어떤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물론 사람을 많이 모아야 한다는 기준에서 생각해 보면 릭워렌 목사의 새들백 교회를 대표로 하여, 한국의 사랑의 교회, 온누리 교회가 실시하는 열린예배가 합당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예배는 인간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시간이 아닌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열린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가 결코 아님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열린예배를 드리는 교회들의 건물구조는 예배당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공간이 아닌, 공연과 문화의 공간으로 이해하고 있다. 더욱이 강단을 이동식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말씀의 권위와 비중을 약화시켰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방법을 존중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성도를 배려한다는 차원에서 하나님을 무시하는 새들백교회의 열린예배는 하나님이 결코 받으실 수 없는 예배가 아닌 공연이나 쇼라고 봐야 할 것이다.

 

3) 결론

 

현대사회는 포스트모더니즘 사회로 사람들의 욕구가 다양해졌다. 그러므로 예배의 형태도 과거의 천편일률적인 형태를 벗어나 약간의 변화를 주는 데는 동의한다. 그러나 예배의 형태 자체를 무시하고, 하나님이 아닌 성도 위주의 예배를 기획하여 실시하는 열린예배는 교회가 받아들여서는 안 될, 사탄의 올무라고 생각한다.


4. 설교는 예배순서 중 어떤 위치에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헌법 예배지침 4장 19조에 보면 설교를 “설교는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하나님의 방편”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다시 말해 설교는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구원을 내려주시는 가장 중요한 시간인 것이다.

개신교는 말씀보다 전통을 중시하는 가톨릭에 반대해 종교개혁을 일으키다 보니, 자연스럽게 말씀이 선포되는 설교를 예배의 순서 중 가장 중요한 위치에 두고 있다. 그래서 예배단을 꾸밀 때에도 말씀이 선포되는 설교단을 예배단의 정 중앙에 위치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순서 중에서 설교는 가장 중요한 위치에 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좀 더 구체적으로, 설교와 성경봉독 중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 본다면 필자는 주저 없이 성경봉독이라고 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봉독은 하나님께서 성경 봉독자의 입을 빌어 직접 말씀하시는 시간이고, 설교는 봉독된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영감을 받은 설교자가 해석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봉독과 설교 중 가장 중요한 위치가 무엇이냐고 물어 본다면, 나는 성경봉독이 더 중요하다고 대답하겠다.

끝으로 설교가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해서 대부분의 시간을 차지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헌법 예배지침 4장 19조에도 “목사는 설교의 시간을 공식 예배 전체에 조화를 이루도록 적절한 시간 배정을 해야 한다.”라고 기록되어있다. 그러므로 설교 시간을 적당히 하는 것 또한 설교를 빛나게 하는 설교자의 임무일 것이다.


5. 병자를 위한 안수기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말하시오.

 

안수기도란 일반적으로 기도하는 자가 기도 받는 자의 몸에 손을 얹든지 혹은 만지든지 하면서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신, 구약 성경에는 안수기도의 예들이 많이 나온다. 구약에서는 축복을 빌 때(창27:1~29), 제사를 드릴 때 제물에(출29:10), 성직을 임명하거나 위임할 때(민27:18 안수기도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어린아이에게 안수하시고 축복하셨고(마19:13~15),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실 때 안수하셨다.(마8:3) 그리고 목사가 집사와 성직을 임명할 때(행6:6), 성령 받기를 위해 기도할 때(행8:15~17) 안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안수는 구약에서는 제사장이 안수했고 신약에서는 예수님 및 사도들이 행했다. 따라서 공식적인 예배나 모임에서는 안수 받은 목회자가 안수해야 한다. 병자를 위한 안수기도 또한 공식적으로 안수 받은 목회자가 해야 한다.

그렇다면 안수기도의 능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물론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그러나 그 능력을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가? 여기에는 의견이 분분하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신유의 은사이기 때문에 그 은사는 개인이 소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심지어는 땅과 건물을 분양하듯이 나눠 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가치관을 가지고 일어나고 있는 운동이 피터 와그너를 중심으로 한 「신사도 운동?인 것이다. 사도는 12사도만 있는 것이 아니고 현 시대에도 사도는 있다고 믿으면서 피터 와그너가 직접 사도를 세워 안수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이 은사를 주셨다 하더라도 그 은사의 소유주는 여전히 하나님이심을 명심해야 한다. 인간은 능력을 소유할 수 없다. 단지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라 주시고 사용하실 뿐이다.

그러므로 병자에게 안수기도를 행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왜냐하면 치료 여부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개적이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공개적인 안수기도로 인해 교회와 목회자에게 큰 위기가 닥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안수기도를 통해 병자가 여러 번 나았다고 해도 자랑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병자에게 안수기도를 한다고 규칙적이고 반복적으로 매번 낫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6. 추모예배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말해 보시오.

 

1) 추모예배의 정의

 

기독교인은 성경의 교훈대로(출20:12) 부모님 생존 시에 효도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돌아가신 후에도 자손들로 하여금 부모님의 기일을 기억하게 하며 크신 은혜를 기념하며 부모님이 남기신 업적과 신앙을 자손들로 계승시키고 자신들의 삶을 반성해 보고 또 가족끼리의 친교를 도모하는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예배가 추모 예배이다.

 

2) 용어 통일

 

먼저 추도예배라고 해야 할지, 추모예배라고 해야 할지, 용어 정리부터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추모(追慕)라는 용어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추도(追悼)라는 용어는 죽은 이를 생각하며 슬퍼해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 말속에는 다분히 불신자적인 인상이 짙다. 추모(追慕)라는 용어의 뜻은 죽은 사람을 기억하고 그리워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기독교에서 사용되어야하는 바른 용어는 추모(追慕)가 되어야 할 것이다.

 

3) 추모(追慕)예배의 의의

 

첫째로 불신가족들에게는 올바른 죽음에 대한 인식을 주는데 있다. 죽음은 죄 값이며 하나님을 향한 반역에서 비롯되었다. 죽음에는 인간의 죄악이 깔려 있음을 인식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을 잠잔다는 말로 성경은 표현한다. 이것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영혼이 깨어난다고 하는 것을 전제한 것인데 불신가족들에게 이것을 알릴 필요가 있다. 그리고 영혼은 사람들의 생각처럼 다시 돌아오거나 혹은 정처 없이 세상을 방황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죽음 이후에는 심판과 부활이 있다. 추모예배를 통해 불신가족들은 이것을 깨달을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둘째로 믿는 가족들에게는 부활신앙이 다시 한번 확인되는 시간이 된다. 자신들도 부모님이나 조상님들처럼 언젠가는 죽지만 다시 부활할 것을 이 기회에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심판과 천국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를 삼게 되는 것이다.

셋째로 추모예배는 조상과 부모님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시간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다. 조상의 경건한 행위는 자손을 지키고 구원을 얻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추모예배는 조상과 부모님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드려져야 한다.

넷째로 신앙상속을 인식하는 특별한 기회가 된다. 추모예배는 신앙상속에 대한 감사가 수반되어야 한다. 부모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부모님을 통해서 믿음을 상속받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게 됨을 다시 한번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 고인을 기릴 수 있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4) 추모 예배를 드릴 때 주의 점

 

첫째로 음식은 조상이 와서 먹는 것이 아니므로 제사상으로 차리면 안 된다. 그러므로 간편한 음식을 준비하였다가 추모 예배 후에 가족들이 둘러 앉아 나누는 것은 좋은 일이다. 둘째로 고인의 사진을 준비하는 것은 좋으나 향이나 촛불을 켜는 것은 기독교적이 아니다. 셋째로 고인의 사진이나 영정 또는 음식물을 향하여 절을 하는 것은 우상 숭배를 금한 계명을 범하는 것으로 죄가 되므로 절대로 하지 않아야 한다. 넷째로 산소에 성묘 갔을 때 음식을 차리고 절을 한다든지 묘지에 술을 붓는 행위는 신앙적인 것이 아니다. 대표자가 간단히 기도하고 묘에 묻힌 조상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 나누고 묘지의 상태를 점검하고 돌아보면 된다.


7. 십일조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말해 보시오.

 

1) 서론

 

신약교회에 있어서 십일조에 대한 논란은, 예수님과 유대지도자들의 논쟁이 보여주듯이 일찍이 초대교회 시대로부터 있어 왔던 문제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에 대한 논란은 교회 안에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고려신학대학원의 십일조에 대한 보고서?에 따르면, 오늘날 십일조에 대한 견해는 세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구약의 율법에 속한 것이므로 신약시대의 교회는 더 이상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신약성경에서 십일조를 하지 말라는 언급이 없기 때문에, 율법을 완성시킨 차원에서 접근 한다면 계속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셋째는 신약시대에도 십일조를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나, 문자적으로 매이지 말고 교회의 입장에 따라 하는 것이 지혜롭다는 것이다.

나의 입장은 두 번째 견해, 즉 십일조를 하지 마라는 언급이 없고, 율법의 완성의 측면에서 십일조의 정신은 계속 이어져 오기 때문에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이런 입장을 가지게 되었는지, 논증해 보도록 하겠다.

 

2) 본론

 

1) 각 교파별 십일조의 형태

 

천주교에는 개신교의 십일조에 해당하는 ‘교무금’이라는 헌금제도가 있다. 이 교무금이란, 개인의 수입정도에 맞춰, 개인이 정하여, 헌금을 하는 것을 말한다.

미국교회는 십일조를 하는 교회도 있고, 하지 않는 교회들도 있다. 그런데 보수교단을 제외한 대부분의 미국 교회들은 천주교의 교무금 형식을 취한다. 미국은 주급 제도이기 때문에, 1년 52주 동안, 매주 주급으로 헌금할 수 있는 액수를 재정을 담당하는 집사와의 면담을 통해 책정한다. 그리고 그 액수는 1년 동안 철저하게 낸다고 한다. 만약 내지 않았을 시, 집이나 직장에 찾아가 받아 낸다고 한다.

그 외 전 세계 모든 대다수의 개신교(루터교, 성공회, 정교회, 독립교단)에는 십일조 제도가 없다. 각 교단의 정서와 방식대로 헌금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교파는 앞에서 말한 십일조에 대한 견해 중, 첫번째와 세번째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 십일조를 시행하지 않는 교파들의 문제점

 

천주교의 교무금과 미국 대부분 교회들의 매주 할당된 헌금 등은 대충 보기에는 아주 합리적인 제도처럼 보인다. 그러나 분명 문제가 있다.

첫째로는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헌금제도라는 것이다. 아브라함 이후로부터 하나님은 줄곧 “십일조”라는 기준과 명칭을 사용해 오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제도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제도와 질서가 무너질 때, 모든 것은 무너지게 된다. 하나님께서 헌금 중에서 특별히 십일조라는 명칭으로 십의 일을 바치라고 하셨을 때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데, 많은 교파들에서 이 명령을 경홀히 여기는 것은 분명 잘못이 있는 것이다.

둘째로, 각자가 낼 수 있는 만큼 내는 것으로 헌금의 액수를 정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다. 이러한 개념은 누가복음 21:1-4에 나오는 과부의 두 렙돈을 근거로 할 텐데, 분명한 것은, 과부의 헌금은 주일헌금의 성격에 해당하는 것이었지, 십일조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주일헌금, 감사헌금, 목적헌금 등은 각자의 형편에 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십일조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명칭과 액수를 분명히 정해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액수를 개인이 정하는 것은 십일조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다.

셋째로, 각 교파의 성장 현황을 살펴보면, 십일조가 왜 필요한지에 대한 답이 나온다. 현재 십일조를 강조하는 개신교의 교파는 침례교단, 감리교단, 오순절교단, 보수장로교단 등 이라고 한다. 그런데 현재 교인수가 증가하는 교단은 대부분 십일조를 하는 교단들이다. 이것을 두고 돈이 있으니 교인이 증가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십일조의 목적 중에 중요한 목적이 무엇인가? 민수기 18:20-32에 나오듯이 레위지파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함이다. 그런데 사사시대에 십일조를 하지 않자 레위지파는 생계문제로 업무를 감당할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사사시대는 영적 암흑시대가 되어 버린 것을 잘 알지 않는가? 그리고 히스기야, 느헤미야 모두 십일조를 통해 영적 부흥을 꾀하려고 했다는 것은, 십일조가 결국 자신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물질을 바침으로 교회와 목회자에게 관심과 애정을 갖게 되고, 생계가 해결된 목회자는 더열심히사역함으로십일조하는교파의 교인수는 증가하게 되는 것이다.

 

3) 십일조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근원적인 문제

 

십일조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신약성경에 구체적인 언급이 없으므로 십일조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마태복음 23:23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는가? 물론 이 본문은 사소한 나물(박하, 회향, 근채)의 십일조까지 드리면서, 정의, 긍휼, 믿음은 버린 유대 지도자들을 책망하시는 내용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는가? 다시 말해 신약시대에도 십일조를 하라고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도 왜 증거가 없다고 말하는가? 그리고 사람들의 형편을 무시한 강압적인 처사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사탄의 교묘한 계략이 숨겨져 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거부와 인본주의 사상이다.

성경은 분명 십일조를 하라고 말한다.(레 27:30-33; 민 18:20-32; 신 14:22-29; 느10:38; 마23:23) 그런데 신약성경에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음으로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면, 신약과 구약의 연결성을 부인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성경말씀 전체를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비평하여 선별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성경비평론자들의 입장과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에는 십일조를 하라는 언급이 없으므로 안 해도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기본적 사고에는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십일조 대신에 각자가 낼 수 있는 만큼 내자고 하는 사고는 17-18세기 영국의 계몽주의 사상 이후 싹튼 인본주의적 사고의 연장선상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무지막지 하신 분이 아니시다. 부자의 많은 돈 보다, 과부의 두 렙돈을 사랑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질서와 제도의 하나님이시기에 십일조라는 제도를 세우신 것이고, 그것이 지켜져야 하나님의 영적 공동체가 힘있게 일할 수 있기에 정하신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형편을 고려해 헌금을 책정한다는 사고는 신본주의 사상이 아닌 인본주의 사상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다. 더욱이 인간은 물질 앞에 욕심을 버리지 못함으로, 자신이 액수를 책정한다면 분명 드릴 수 있는 액수보다 적게 드릴 것이 분명하다. 「올바니 한인 천주교회?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해 본 결과, 각각의 천구교회들 마다 교무금을 너무 적게 책정하거나, 합의한 교무금을 내지 않아 운영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교무금 납부가 밀려 성당 가는 것 자체를 부담스럽게 여기기까지 한다고 한다. 이것은 헌금을 내는 성도들을 시험에 빠뜨리고 헌금봉헌을 통해 은혜 받을 기회를 주지 않는 잘못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본주의적인 사고로 십일조의 액수를 정하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이다.

 

3) 결론

 

오늘 나는 십일조에 대한 자질구레한 설명은 제외하고, 십일조를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나의 소신을 밝혔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약과 신약이 다르지 않다.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자이심으로 구약의 형식은 변형될 수 있어도 정신은 그대로 계승되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에서 십일조를 하라고 했다면 신약시대에도 반드시 십일조를 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잘못을 들추고 비판하기 좋아하는 사람에게,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랑하기에도 바쁜 세상인데, 뭘 그리 인상을 쓰고 다니십니까?” 그렇다. 하나님께서 하라는 것 하기도 바쁘고, 하지 말라는 것 안하기도 힘든데, 분명히 하라고 한 것을 이상한 논리로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좌파적인 인식이다.

그리고 오늘날 십일조로 인해 교회에 물질로 인한 비리가 많기에 십일조 제도를 개선하거나 폐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말에 걸맞은 속담이 있지 않는가? “벼룩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운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사상에 물든 교회들이 십일조를 폐지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런데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교인은 점점 줄어들고 교회의 존폐까지 걱정해야 할 지경에 이르지 않았는가?

십일조는 분명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해야 한다. 인간의 여러 이견(異見)과 반대가 있더라도 성경이 무오하다고 믿는다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 이것이 성도를 건강하게 만들고, 축복의 주인공이 되게 하며, 교회가 주님 오실 때까지 존재하게 될 바탕이 되게 될 것이다.


8. 술과 담배에 대한 나의 견해를 말해 보시오.

 

그리스도인이 술을 먹는 것이 잘못인가? 혹은 담배를 피우는 것은 어떤가? 담배에 대하여서는 성경에 언급한 것이 없다. 그리고 술에 대하여서는 성경에서 이미 노아 때부터 이야기 되고 있다. 노아가 포도주를 먹고 취한 상태에서 실수를 한 것을 통해 성경은 술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다.

 

1) 술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성경은 술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성경은 술 자체가 나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노아가 술을 마시고 실수를 했지만, 술을 사람이 마시는 음식의 하나로서 생각하고 마신 것이 분명하다(창세기 9장). 술 자체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좋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술을 먹어서 사람이 기분이 좋아지기고 기쁨을 누리는 것을 구약은 금하지 않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술과 관련하여 이런 긍정적인 가르침도 있지만, 부정적인 가르침도 성경에는 나온다. 잠언 20:1절에는 “포도주는 거만하게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무릇 이에 미혹 되는 자에게는 지혜가 없느니라”라고 했다. 포도주와 독주에게 미혹 즉 점령당하지 않도록 경계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즉 술로 인하여 자신이 통제를 못할 정도가 되고 거만하게 되어서, 헛소리를 하면서 야단법석을 벌리는 자리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를 할 수 있다. 술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술에 빠져서 정신을 잃고 자기 일을 하지 못할 자리에 들어가서는 결코 안 된다. 더구나 술에 인이 박히고 술을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지거나 중독 상태가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술을 다스려야지 사람이 술에 빠지고 노예가 되면 아니 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술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술을 취급하는 사람의 문제이니, 사람이 술을 바르게 취급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2) 한국 교회 금주문화의 배경

 

성경은 술에 대하여 긍정적인 면도 말하고 있고, 부정적인 면도 말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아예 술을 먹지 못하도록 처음부터 교회 관례로 금지해버렸다. 그러면 한국 교회는 왜 처음부터 술을 먹지 못하도록 금지했을까? 그것은 선교당시에 한국의 상황과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선교사들이 처음 한국에 와서 보니 술이 한국 사람들을 망치고 있다고 판단할 만큼 한국 사람들은 술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아예 술을 금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여서 술을 금지해버렸다. 하지만 현재에는 이러한 전통이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는 상황이다. 술은 신자 개인이 알아서 판단할 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3) 한국 교회 금주문화의 당위성

 

그러나 이렇게 변해가는 것이 잘 하는 것일까? 필자는 이런 것을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비록 성경에서 술 자체를 죄악시하지 않기 때문에 알맞은 상황에서 알맞게 사용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몇 가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첫째, 우리 사회의 인식이다. 우리 사회의 인식은 아직도 기독교인은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참으로 긍정적인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랫동안 신자들이 사회적인 눈총과 시선을 이기면서 형성하게 된 아름다운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아름다운 전통을 신자 스스로가 무너뜨리기 보다는 오히려 세우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비록 술 자체는 선한 것이며, 때로는 먹을 수 있다고 할지라도, 세상 사람들이 기독 신자들은 술을 먹지 않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다면, 신자들은 세상 사람들 앞에서 술 먹지 않는 사람으로 나타나도록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린도전서 10:23에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라는 말씀을 기억 한다면 성도의 금주문화는 당연히 지켜가야 할 좋은 문화일 것이다.

둘째, 신자는 영적인 전투의 상황에 있는 자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원리적인 이해가 분명하지 않는 상태에서 변질은 세상과의 타협이요, 전투 정신의 포기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과 친구나 동료들이나 손님과 고객이 술을 먹도록 강요하는 상황일지라도, 신자는 이런 상황에서 타협하기 보다는 당당히 자신이 기독신자임을 드러내면서 그것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신자에게는 술의 힘 아닌 성령의 힘이 있다. 마음이 울쩍하고 어려울 때도 술에 의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말씀과 기도로 영적인 힘을 얻어서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넷째, 술은 먹기 시작하면 습관화되는 위험이 강하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술을 즐겨 먹으면서 술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그러므로 기독인은 아예 술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술을 상용하겠다거나 자주 먹겠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옳다.

 

4) 한국 교회 금연문화의 당위성

 

담배에 관하여서는 말씀의 원리를 원용할 수 있겠다. 우리의 육체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전이다. 이런 육체를 잘 관리하고 깨끗하게 하는 것은 마음과 정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술은 육체에 약간의 유익이라도 있지만 담배는 인체에 이로운 것이라고는 전혀 없다. 이런 백해무익한 담배를 성도가 피워야 할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외국에서는 목사나 신학 교수들 중에서도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하나의 습관이 되어서 그렇게 하는 것 같다. 물론 그들도 건강을 생각해서 담배를 끊는다고 한다. 그러나 외국에서 한다고 따라 할 필요는 없다. 제 몸을 자기가 지키는 것도 성도가 몸을 주신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담배는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술과 담배로 성도됨이 구별되는 한국의 상황에서는 아예 이런 것들을 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9. 개혁주의 안식일관에 대해 간단히 말하세요.

 

1) 안식일의 유래와 변천과정

 

안식일의 히브리어 뜻은 '중지하다' 또는 '그만두다'라는 뜻이다. 유대인들이 금요일 해질 무렵부터 다음날 어두워질 때까지 휴식하며 거룩하게 지키던 날이다. 안식일 제도는 창조 때 시작되었다. 천지창조 이야기(창1:1-2:3)는 하나님께서 제 칠일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그것은 이날에 하나님께서 창조사역을 끝내시고 안식하셨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16:21-30 이전에는 안식일에 관한 언급과 그와 유사한 표현마저도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 도착하기 전에 신 광야에서 그들에게 만나를 주셨는데, 안식일에는 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안식일 전날에는 두 배의 양을 주셨다. 그 후 40년이 지나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바를 상기시키면서, 아울러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의 종살이로부터 구원해 내셨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안식일을 지켜야 할 특별한 의무가 있다고 말하였다(신5:15). 히브리인들 사이에는 안식일이 '휴식', '예배',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림'과 같은 개념들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지, 그것이 어떤 특이한 금기사항들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바벨론 포로기간 중 회당의 발달과 함께 안식일은 휴식하는 날뿐만 아니라 예배를 드리며 율법을 공부하는 날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율법이 강화되면서 안식일을 지키는 규정들도 많아지고 강화 되었다.

 

2)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

 

예수님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특별히 두 가지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첫째는 자기가 메시야라고 주장하신 것이고, 둘째는 안식일 준수에 관한 문제였다. 랍비들은 안식일 준수 그 자체를 목적으로 생각한 반면 예수는 안식일이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제정되었으며 따라서 사람의 필요가 안식일 법 준수보다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마12:1-14)

 

 

3) 주일의 기원

 

그리스도인들이 왜 안식 후 첫날에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가는 아직도 문제로 남아 있다. 모든 학자들은 한 가지 점에서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는데, 즉 첫날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부활의 기념일로 축하되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은 부활사건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발생과정을 정확히 설명하기란 용이하지 않다. 옛날부터 인정되고 세계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일요일(주일)예배와 같은 관습이 그 정확한 기원에 대해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첫날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모두가 동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관례가 언제 어디서 왜 생기게 되었는가 하는 세부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성경의 저자들과 대부분의 고대 교부들이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 같다.

 

4) 안식일과 주일의 관계

 

기독교의 주일은 유대인의 안식일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옛날의 이스라엘 같이 현대의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들처럼 하나님의 날을 지키고 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종의 멍에에서 구속하셨다는 의미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안식일은 언약의 표징이 된다. 그날에 즐거움으로 일을 쉬지 아니한 이스라엘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성실하심을 멸시한 자요, 자기의 소망을 하나님의 택하심에 두지 않고 오히려 자기 자신의 일에다 두었던 자인 것이다. 그것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주의 날의 기쁨은 세속적인 잔치의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은혜를 믿는 신앙을 통해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 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은총을 기억하며 그의 위대한 구원 역사를 기대할 때 얻게 되는 충만한 기쁨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했듯이 비록 이방인일지라도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 모두를 구원하셨다.

그러므로 구약의 안식일의 개념은 신약의 주일의 개념에 그대로 녹아 이어져 오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