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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교회란 무엇인가?

주전담백 主前淡白 2007. 8. 29. 15:34

 

 

새로운 산책


1. 머리말


내가 우리나라 풍물놀이 중에서 가장 스릴 있는 것으로 꼽는 것은 ‘줄타기’이다. 5m의 높이도 높이지만, 옆에서 부는 바람과 줄의 흔들림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고려하여 줄을 탄다는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외국의 서커스처럼 줄 위를 그냥 걸어 다니는 것에 그치지 않고, 줄의 탄성을 이용해 뛰어 오르기도 하고, 실수하는 척 하며 웃음을 유발하는 등, 줄 위에서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인생을 담아낸다는 것이 줄타기의 묘미라고 생각된다.

오늘 나는 이 줄타기와 같이 스릴 있고 묘미 있는 책 한권을 만났다. 한스 큉(Hans Kung)이라는 시대의 풍운아를 알게 된 것도 스릴 있었지만, 한 곳으로 쏠리지 않고 균형을 맞춰 내용을 전달하려는 노력에서, 전문서적의 따분함을 잊을 체 즐거운 3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면서 한스 큉이 누군지 조사해 알게 되었고, 교황 베네딕토 16세도 긴장시킬 정도의 사람이었다1)는 것도 알게 되면서, 이 책을 좀 더 진지하게 살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럼 지금부터, 내가 경험한 ‘새로운 산책’에 대해 함께 나눠 보고자 한다.



2. 본문


1) 비판으로 전문지식을 전하다.


이 책은 교황의 권위에 도전한 신학자가 쓴 책답게 가톨릭에 대한 비판을 서슴치 않는다. 교회를 절대시 하고 신앙시 하는 가톨릭의 권위에 도전하면서, 교회는 역사 속에서 변해야 하고 신약성서에 근거해야 한다고 한스는 주장한다.2) 그리고 교회가 오래된 조직기관이고, 하나님의 은총이 교회를 통해 내려오므로 찬양 받을 만 하고, 믿을 만 하기도 하지만, 결코 교회를 믿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3) 더 파격적인 것은 교회는 성직자 중심이 아니고, 성직자화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4) 이와 같이 한스 큉은 가톨릭교회의 폐해를 낫낫이 비판하고 있다.

그렇다고 가톨릭교회만을 비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프로테스탄트, 개신교회의 문제들도 비판하고 있다. 개신교회가 참교회의 특징으로 복음 설교와 합목적적인 성사를 주장하면서 가톨릭교회가 이를 무시한다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면서, 가톨릭교회도 복음 설교와 합목적적인 성사를 참교회의 중요한 표징으로 삼지만 그동안은 미흡했다라고 주장한다.5) 그러면서 가톨릭교회가 좀 더 복음적이어야 한다고 한스는 주장 한다6).

이러한 비판의 목소리들 속에 교회에 대한 전문 지식이 포함되어 배달되니, 좀 더 맛있게 교회에 대해 알아 갈 수 있게 해 놓았다는 긍정적인 인상을 받게 되었다. 보통의 전문서적들은 사전적인 의미와 사실적인 의미를 중심으로 해서 밋밋하게 전개되어 지는데, 가톨릭과 성전(聖戰)을 벌여 얻은 지식답게 비판적인 목소리와 함께 전달되어지니,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설교도 이와 같지 아니한가? 단순히 성경을 묵상하고, 주해(註解)해서 얻은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묵상하고 주해한 설교의 내용을 현실 속에서 적용해 보고, 치열한 상황 속에서 경험된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전달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겠는가? 오늘날 무미건조하고, 틀에 박힌 사고와 전달의 양식 속에서 한스 큉이 시작하는 전달의 방식이야 말로 우리 신학도들이 배워야 할 좋은 전달방법이 아닐까 생각된다.


2) 색다르게 전하는 교회의 속성들


한스 큉은 교회의 속성을 우리에게 말할 때에도 평범한 방법을 거부한다. 부정에서 시작하여 긍정으로 이르는, 사람의 사고를 끊임없이 자극하는 방법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한스는,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고 말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전조’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교회를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한다면 가톨릭교회가 범하고 있는 오류인 ‘교회 찬양론’에 빠질 수 있다고 한스는 이야기한다.7) 이렇게 교회에 대해 일반적으로 오해하고 있는 부분을 비판하면서 교회의 속성에 대해 한스는 말하고 있다.

한스가 말하는 교회의 속성은 크게 다섯가지이다. 먼저 교회는, 지나가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임시적이고 일시적인 것이고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것이지 교회 자신을 설교의 중심으로 놓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둘째로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를 기도하고, 하나님의 행동을 신뢰해야지 교회를 신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셋째로 교회는, 중세 가톨릭교회가 추구했던 것과 같은 신정 체제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봉사하는 자세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을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교회의 임무인 것이라고 한스는 주장한다. 넷째로 교회는, 파멸을 선포하고 죄인들을 배척하는 곳이 아니라, 복음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죄인들을 품는 곳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하나님꼐 순종하기 위해 세상을 등져서는 안 되고, 세상 속에 있되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노라는 근본적인 결단 속에서 순종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한스는 주장한다.8)

이런 한스의 주장을 정리해 보면, 교회는 봉사하고, 낮은 자를 돌보며, 세상 속에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중간단계의 공동체일 뿐이지, 권위를 만들고, 지배하려 드는 공동체가 아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주장은 아마도 그간 가톨릭교회가 교회의 권위와 교황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범죄와 오류를 범했는가를 비판하는 가운데서, 교회의 속성을 정리했기 때문에 나왔다라고 생각된다.

비판과 함께 담긴 이런 교회에 대한 속성 정의야 말로 참으로 필요하면서도 옳은 정의라고 생각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우리 개신교회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개신교회가 가톨릭교회에서 왜 떨어져 나왔는가? 말씀을 무시하고, 성례를 조작하면서 까지 교회의 권위와 교황․사제의 권위를 세우려 했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는가? 그런데 오늘날 개신교회에도 과거 중세의 가톨릭교회의 폐단들이 나타나고 있다. 말씀보다 목사의 말을 우선시하려 한다. 성경의 권위보다 교단과 총회의 권위를 우선시 하려 한다. 성례를 성스럽게 말씀대로 집행하려 하기보다, 교회의 권위와 이익에 우선하는 선에서 집행하려 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스가 교회의 속성은 오늘날 그 어떤 학자가 정의하는 교회의 속성들보다도 우리 개신교회의 현실에 속히 적용해야할 것이라 생각한다.


3) 교회 속에서의 성령과 그리스도의 역할


우리 개신교회에서도 교회에 그리스도와 성령의 역할을 매우 강조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고, 예배의 근거가 되시고, 성령은 교회를 세우시고 이끄시며 예배의 리더가 되신다고 우리 개신교회에서는 이야기 한다. 교회에 있어서의 성령과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한 우리의 주장과 한스의 주장은 일치하고 있다.

한스는 교회는 ‘성령의 집’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교회가 성령은 아니므로 신성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도 빼 놓지 않는다. 그리고, 성령이 교회에 매여 있는 존재가 아님을 강조하면서, 성령은 바람이 불고 싶을 때 부는 것처럼 자유롭게 활동하실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성령은 교회 공동체에게 카리스마, 즉 은사를 주시는데, 그 은사는 교회를 위해 쓰여져야 하고, 성령은 그 은사가 잘 쓰여 지도록 질서를 부여하신다고 한스는 말한다.9) 그리고 한스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생애와 부활이 없이는 교회가 존재할 수 없음을 한스는 강조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몸에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머리되는 그리스도를 향해 자라가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순종해야 할 위치에 놓여 있음을 한스는 말하고 있다.10)

이러한 한스의 주장은 개신교회보다 더 개신교회적인 주장이라 할 수 있다. 보통 가톨릭교회가 교회를 말할 때, 형식상으로는 성령과 그리스도를 강조하지만, 교황과 교회의 전통을 더 강조하는 것과는 정 반대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한스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모습이 바로 우리 개혁교회에 필요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된 점들, 모순된 점들, 곪아 터지기 직전인 문제들을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으니까....’라는 식의 생각으로 덮어 버리면서 용기 없이 주먹만 접었다 펴는 것이 우리들이 아닌가? 가톨릭교회에의 일원이면서 바른 것이라면 교황과도 맞설 각오를 했고, 실질적으로 맞서 파면 당한 한스의 이 자세야 말로 우리 개혁교회가 본받아야 할 자세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성령과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인임을 강조하면서 그분에게 주도권을 드리고, 그분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는 한스의 주장을 들으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교회를 섬기면서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시고, 우리가 순종해야 할 분이라는 것을 인지하며 행해왔던가 하는 점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를 세우시고, 이끄시며, 완성해 가시는 분이 성령님이심을 알게 되면서, 나는 그 성령의 이끄심에 주의하고 있는가도 돌아보게 되었다. 오늘날 교회들이 삐걱거리고, 정체된 이유도 여기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의 욕심으로 얼룩진 모순들을 내려놓고, 밝은 눈과 안정된 마음, 선한 양심으로 성령과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교회는 다시 한번 갱신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4) 참교회와 사제의 봉사 수위권에 대한 변론


30년 전쟁이 하나인 참교회를 가려내기 위한 전쟁이었음을 알고 있다. 아직도 가톨릭교회는 가톨릭교회만이 참교회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인식 가톨릭신자인 한스에게도 남아 있어서 그런지, 가톨릭교회가 참 교회임을 은연 중에 주장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스는 참교회의 표징을 단일성(單一性), 보편성(普遍性), 성성(聖性), 사도성(使徒性)으로 말하고 있다. [단일성]은 지역적, 단위적인 의미가 아닌 성령 안에서 하나됨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고, [보편성]은 복음에 기초를 둔 본질을 유지하는 성질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성성]은 교회는 죄 많은 곳이지만 순결을 유지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사도성]은 사도의 증언을 계승, 수행하여 봉사해야 참교회라고 말하고 있다.11) 이렇게 말을 하면서 한스는 그동안 실수가 많기는 했지만, 이러한 요소들을 가톨릭교회가 충족하고 있기 때문에 가톨릭교회가 참교회라는 주장을 은연 중에 펼치고 있다.

사제에 대한 한스의 주장도 위와 맥락을 같이 한다. 사제가 교회의 주인이 아니고, 모든 성도가 사제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앞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그리고, 사제는 지배자가 아닌 봉사자라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스는 사제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영적 제사 드리는 것, 말씀 전파하는 것, 성찬과 사죄 수행, 중계자의 역할을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장로, 감독, 집사와 같이 교회의 지도자 위치에 있어야 할 사람이고, 성경에서도 인정하고 있는 ‘봉사 수위권’을 가진 사람이라고 사제의 권한을 옹호하고 있다.12)

이러한 모습은 가톨릭에 대한 개신교의 주장에 대해 변론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했던가? 가톨릭에 대해 많은 비판을 가한 한스 큉 이지만, 가톨릭을 향한 애정은 숨길 수가 없는 모양이다.


5) 교회의 최종적인 지향점 “복음과 봉사”


끝으로 한스는, 교회는 세상을 향해 봉사하는 것이 교회의 지향점이요, 나아가야할 방향이라고 말한다. 교회의 봉사가 교회의 권리를 포기하고 양보하고 침묵하는 것과 같은 소극적인 모습도 있지만, 세상을 향해 어디서 왔는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궁극적으로 신과 인간, 구원의 화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적극적인 모습도 가져야 한다고 한스는 말한다. 이런 적극적인 봉사를 위해 교회는 복음을 가지고 세상에 나가야 한다고 한스는 말한다. 복음증거 하는 것이 세상을 향한 가장 현명하고 유익한 봉사라고 한스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13)

이 얼마나 바른 교회관인가? 세상을 향해 봉사할 때, 가난과 전쟁과 질병을 돕는 봉사를 말하고 있지 않고, 복음으로 세상이 알지 못하고 발견하지 못하고, 만날 수 없는 것을 깨우쳐 주라는 이 말! 교회의 지향점을 너무나도 잘 설명한 말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오늘날 개신교회도 이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개신교회들이 건축이라는 욕심의 족쇄에 매여 교회의 본질적 사명들을 포기하고 있는지 모른다. 많은 개신교회들이 외형적인 성장에만 급급한 나머지 영혼을 돌아보고, 지친 자를 위로하며, 약자를 진심으로 정성을 다해 돌보라는 주님의 명령을 건너뛰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보고 있지 않는가? 한스가 말하는 교회의 지향점을 우리 마음에 새기면서, 세상이 알지 못하고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사실과 감격들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기를 즐겨하고 노력하는 우리 교회들이 되어야 하겠다.



3. 맺음말


난 이제 3학년이 되었다. 3학년이 되면서 뒤를 돌아보니 많은 아쉬운 점들이 남는다. 그 여러 가지 중에서 깊은 아쉬움을 주는 것 중의 하나가 ‘의미 있는 독서’이다. 교회사역 하랴, 리포트 써 내랴, 가정 돌보랴 분주한 2년을 보내면서 독서다운 독서를 하기 보다는 리포트를 쓰기 위한 독서만을 해 왔던 나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리포트를 쓰기 위해 속독을 하면서, 필요한 내용만을 메모하면서 책을 읽었던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남은 1년 동안이라도 리포트를 쓰기 위한 독서가 아닌, 의미 있는 독서를 위한 독서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그런 다짐 후 처음 읽은 책이 바로 이 책, [교회란 무엇인가?]이다. 과거 같으면 한 30-40페이지 읽다가 접어 두고, 중간부터는 대충 읽어 리포트 쓰기 위한 내용만을 뽑아내기에 바빴는데, 이번에는 ‘차근차근 끝까지 읽어 보리라.’ ‘필요한 내용이 아닌, 중요한 내용을 한 장이 끝나는 부분마다 메모하며 내용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리라.’라고 다짐을 하면서 3시간 동안, 새벽 2시까지 책을 읽었다. 그런 각오로 책을 읽으니 마음에 여유도 생기고, 책의 내용이 나의 생각과 결합되어 머리에 저장되며, 독서의 즐거움이란 것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난 후 리포트를 쓰게 되니, 책의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고, 전체적인 안목을 견지한 채로 책을 쓸 수 있게 되어, 좀더 풍성하고 치밀한 리포트를 쓸 수 있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틀 동안 ‘새로운 산책’을 한 기분이다. 지금까지 다니던 길이 아닌, 새로운 길로, 지금까지 걷던 방법이 아닌 신중한 걸음걸이로, 지금까지 바라보았던 급한 시선이 아닌 여유 있고 한가로운 시선으로 산책을 한 기분이다. 그리고, 셔츠를 적실 정도의 적당한 땀과 같은 성과와 다시 가고 싶다는 여운을 품을 만한 추억을 간직하게 되었다. 이번 이 책을 통해, 비판적 상황 하에서 전개된 교회에 대한 전문 지식을 얻은 성과도 값지지만, 새로운 산책과 같은 새로운 독서를 경험하게 된 것도 값진 성과였다고 생각된다. 좋은 책을 만나게 하시고, 신중하게 읽고, 신중하게 글 쓰게 하신 유해무 교수님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