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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구원계시의 발전사 2

주전담백 主前淡白 2007. 8. 29. 15:37

 

 

구원계시의 발전사Ⅱ

(W.A.밴게메렌)

 

<요점정리>


제9부 예수와 그 나라


서론

말라기 이후 수세기 동안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 그러나 세례요한을 시작으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 주셨다. 신약의 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을 이룬 하나님의 계시를 증거한다. 그리고 메시야의 시대는 과거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힌 모든 대적들과 악의 종말을 나타낸다. 즉 새시대의 기쁨은 구속사의 중심이신 그리스도의 오심에 있다.


제27장 예수그리스도의 복음

사복음서는 본래 우리 주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담고 있는 문헌 자료들 중에서 유일하게 현존하는 것이다. 이런 복음서들은 예수께서 즐겨 사용하시던 비유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은 마가복음과 같은 다른 자료들에 어느정도로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마가의 자료를 크게 확장하고 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고유한 자료들도 있는데, 첫째, 예언자의 말의 성취, 둘째 기독교와 유대교의 구별, 셋째 기독교와 유대교의 연속성, 넷째 순종과 제자도에 대한 철저한 성격, 다섯째 종말론적 심판이 그것이다.

마가복음은 지리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리적 구성은 신학적-문학적 관점에 근거한다. 마가는 예수께서 갈릴리 출신이고, 갈릴리에서 사역하셨고, 예루살렘에서 고난 당하시고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로 되돌아가신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복음서의 목적이 예배의식을 위한 것인지 교리문답을 위한 것인지, 논쟁을 위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일치된 견해가 없다.

누가의 독특한 역사의식은 그의 서론에서 나타나는데, 거기에서 그는 그가 어떻게 ‘처음부터’ 예수에 관한 모든 것을 주의 깊게 조사하여 그것을 근거로 해서 차례대로 복음을 기록하려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누가는 다른 복음서 기자들보다도 더 구속사 안에서의 예수의 위체에 대해 몰두한 것 같다. 누가가 종말적 사건을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종말에 대해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누가는 역사적 도식화에 관심을 두면서, 예수의 생애를 약속들의 성취로 전개하고 있다.

요한은 예수에 관해 다른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예수의 생애의 사건들보다는 예수의 말씀과 그가 일으키신 이적들의 표적으로서의 가치에 더 관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예수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는데 도전을 준다.

이 사복음서들은 그리스도이신 예수에 대해 다양하게 증언한다. 그러므로 독립된 가치를 갖는다. 이 사복음서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에 대하여 만화경 같이 변화 무쌍한 증언에 기여하고 있다.


제28장 요한과 예수

세례요한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한 자로 택함을 입고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의 선지자로 구별되었다. 그리고 요한이 명백하게 회개하라고 외친 것은, 그의 엄격한 생활과 잘 결부되어 있다. 그리고 요한의 설교는 메시야가 오신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다. 요한의 구속사적 위치는 선지자의 위치이다. 종말을 구원과 심판의 날로 말했던 구약의 선지자들과는 달리, 요한은 오실 자를 이미 여기에 존재하는 분으로 언급하고 있다. 예수께서 세례요한에 대하여 하신 증거는 그것이 요한의 사역의 의미를 확증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에 대해, 그 나라에 대해, 하나님께로 가는 길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러나 자신에 대해서와 지상에서의 그의 사명에 대한 말씀은 조심하셨다. 그러나 예수는 분명 메시야시다. 기독교 공동체는 그리스도, 메시야라는 칭호로 예수의 직무와 동시에 그의 구약과의 관곌르 표현한다. 이 메시야 혹은 그리스도라는 칭호의 중요성은 예수님 자신이 그것에 부여하신 의미에 있다. 바로 고난을 위한 메시야인 것이다. 메시야이신 예수는 메시야 시대의 출발에서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나타내기 위해 오셨다. 둘째로, 예수는 다윗 계열의 메시야이시기도 하지만, 아버지의 독생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께서는 사역기간 동안 많은 이적을 베푸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나타내셨다. 그의 출생과 지상생애를 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성육하신 아들이라는 점에서 아버지와의 언약적 관계를 더 깊은 방법에서 나누도록 다른 사람들을 초청할 권위를 갖는다. 셋째로, 예수님은 자신과 자신의 사명에 대해 말씀하실 때 ‘인자’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셨다. 인자는 메시야가 해야 하는 모든 것에 대한 우리 주님의 표현으로서 전형적인 유대인들의 메시야적 개념을 피한다. 그 증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인자는 하늘에서 오고 아버지로부터 권위를 받으며 이 땅에서 그의 사명을 감당한다. 둘째, 인자는 고난 받으로 이 땅에 오셨다. 셋째, 인자는 오셔서 그의 메시야직분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권세가 그의 것임을 나타내실 것이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바라보는 인자의 개념과 다른 것이다. 넷째로 누가는 부활 이후의 관점에서 예수를 성육하신 영광의 로 묘사한다. 요한도 그에 대해 ‘주’로 언급함으로써 부활하신 예수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준다. 다섯째로, 예수의 성육적 사역은 개개인을 하나님께 화해시키고 인류의 죄를 속하는 구원자의 사역이다. 복음서에서는 두 본문에서 예수를 ‘주’로 부른다.(눅2:11, 요4:42) 주라는 칭호는 죄에서 구원하시는 그의 능력보다 훨씬 많은 것을 지칭한다. 그는 능력과 영광과 보호하심으로 그의 통치를 세우시는 구원자 통치자이시다. 여섯째로 메시야 직분과 관련하여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은 다윗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것이다. 마지막 일곱째로, 탄생 시에 마리아는 그를 ‘예수’라고 불렀다. 이 예수(구원)라는 이름은 우리 주님의 이름들의 의미들을 전체로 통틀어서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 주님의 칭호들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한다. 예수는 그가 성육하신 하나님이라고 담대히 주장하신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인자요, 하나님의 메시야시도다! 그는 귀를 기울이는 자들에게 구원과 영광을 약속하시지만, 그를 거절하는 모든 자들에게는 심판과 수치를 약속하신다.


제29장 하나님의 나라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관점에서 하나님 나라의 네가지 측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로, 하나님 나라는 이미 구약에 있었다. 구약은 우리에게 그 나라에 대해 3중적 관점을 제시한다. 첫째, 하나님은 그의 모든 창조물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왕이시다, 둘째, 주께서는 이스라엘에 그의 나라를 세우셨고 예루살렘에 그의 발등상을 두셨다, 셋째.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도 오고 있다는 선지자들의 관점이다. 예수께서 오셨을 때, 천사들과 세례요한과 하늘에서 들린 아버지의 음성은 모두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그 나라이시다. 즉 신약의 그리스도는 창조자, 구원자, 왕이시다.

복음서의 기자들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위한 예수의 사명에서 이러한 우주적 관심을 기록한다. 예수께서는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을 불러내기 위하여 오셨다. 그 나라의 상속자가 되기 원한다면, 첫째, 어린이와 같은 믿음을 입증해야 하고, 둘째, 구하는 일에 끊임 없이 열심히 전념해야 하며, 셋째, 그들이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그리스도께 받은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넷째로, 그나라 자녀들은 축복을 받은 자들이고, 다섯째, 그나라 자녀들은 미래를 미리 맛보는 즐거움을 누린다.

그 나라에 대한 논의 가운데 가장 주된 주제들 중 하나는, 그것이 현재인가 아니면 미래인가의 문제이다. 가라지 비유와 누룩 비유에 의하면 그 나라는 천천히 성장한다. 그리고, 감추어진 보물 비유와 진주 비유에서는 얻을 수 있는 목표의 극치임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그물비유에서는 의인과 악인이 미래에 구별될 것을 곡식과 가라지 비유에서는 의인과 악인이 세상에 공존함을 인식하게 했다. 이런 비유들을 종합해 보면, 예수님께서는 다가오는 그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모두 가르치심을 알 수 있다.


제30장 예수의 메시야적 사명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오시자, 예기치 못했던 상태에서 메시야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즉 유대인들이 기대 하지도 않았던 종으로서의 메시야가 이땅에 오신 것이다. 사도들은 예수께서 자신의 종의 역할에 대해 가르치신 것을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종이라는 단어는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3중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권계, 권위, 자발적 순종이 그것이다.

종의 개념에 더 첨가하여 복음서들은 교회와 관련된 ‘아들’에 대해 말한다. 그는 아들이심을 성취하셨고 또 성취하시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그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기 때문에 이제 그의 교회를 다스리시며 그으 택한자들을 모으기 위해 큰 영광과 함께 나타나실 것이다. 마태복음은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사이의 친밀성을 더 잘 이해하게 해 준다. 예수께서는 모든 이스라엘에게 회개하고 자신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로 여기도록 촉구하셨다. 그러나 포도원 농부의 비유에서 명백해진 바와 같이 그들은 그를 거절했다. 따라서 그 나라는 그들에게서 탈취되어 다른 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이런 목적에서 마태는 또한 선지자들과 예수의 사역의 연속성을 증거하고 있다. 그는 아버지께서 보내신 아들로서 오셨다. 선지자들인 그 종들을 거절한 것과 같이 그 아들을 거절한 것은 아버지와 하나님의 확실한 심판에 대한 거절을 가리킨다. 예수의 사명은 교회에게 주어졌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와의 연관성은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는 천지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이다. 그 통치는 영원무궁토록 지속될 것이다. 지금 교회에 속한 자들은 그 나라의 능력을 체험할 것이다. 교회는 곧, 하나님의 통치를 깨닫는 자들 없이 그 나라는 있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나라 없이 교회가 있을 수도 없다. 즉 교회와 하나님 나라는 상호 연관성을 가기조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사명을 계속하기 위하여 그의 제자들을 부르셨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위에서 오는 능력을 성령의 인격 안에서 그으 교회에게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성령의 시대는 영광스런 메시야에 대한 완전한 계시를 준비하면서 기대한다. 성령의 사명은 영광의 그리스도의 은혜를 예수 믿는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주셨는데, 이 새로운 삶의 방식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예수를 만족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사랑은 예수께 대한 순종의 표현이다. 이러한 순종은 다른 사람을 위해 기꺼이 자기 목숨을 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삶 전체를 포함한다.


제10부 사도 시대


서론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은 구원의 적용에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개입하심과 그 나라의 확장, 교회들의 설립, 복음을 이방세계에 적용시킴, 다가올 영광스런 나라에 대한 소망을 증거한다.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의 이러한 증거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서 우리는 정경적 상황과 관련된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의 문학적 공헌, 즉 유다로부터 이방세계로 나아간 그 나라의 발전을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제31장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들의 증거

신약의 글들은 예수의 성육신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그가 만주의 주요만왕의 왕으로 영광을 받으신 것을 더욱 더 강조한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예수를 하나님의 약속들과 언약들을 완전히 이루실 자로 묘사하는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들의 증거가 담긴 글들을 살펴 보도록 하자.

사도행전은 무엇보다도 초대교회의 역사를 기록하려고 쓰여진 것이 아니다. 역사적인 자료가 신빙성이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누가의 첫 번째 관심은 신학적이다. 그는 사도들의 사역 안에서 계속되는 예수의 사역에 관심을 보인다. 이러한 목적에서 그는 설교들을 인용하고 사도들의 이적들을 사용하며 복음서의 예수이 사역과 부활하신 예수의 사역을 연관시키는 문학적 장치들로서 요약된 기사들을 제시한다.

서신서들은 신약의 1/3을 차지한다. 서신서들은 1세기 교회의 매우 복잡한 모습을 나타낸다. 사도들은 영광의 그리스도를 주로 나타내고 그리스도의 구속의 성격과 위치를 언급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 영광스러운 날을 위해 스스로 준비하라고 권면한다. 더욱이 그들은 구약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비유, 즉 복음의 전승들 사이의 신앙적 연관성이 계속 되지 않는다는 모든 거짓 교훈을 물리치기 위해 예를 들거나 직접적인 가르침으로 교회에게 경고한다.

선포로, 예수의 능력에 의한 표적들의 방법으로 성령의 임재로, 사도적 전승의 가르침으로, 그리고 서신들을 통해서 사도들의 증거는 우리 주님과 그의 교회와의 역동적인 연속성의 의밀르 전한다. 그러나 성령의 오심, 이방인 선교, 유대적인 개념을 지키지 않는 자유와 같은 뷸연속성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불연속성의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예수의 가르치심과 부활과 영광에로 올리우심의 관점에서 선지자들의 말을 통하여 예수에 대해 말했다.


제32장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증거

바울의 서신들은 분명히 예수께서 주시는 은혜의 본질, 성숙한 자녀들과 아버지와의 교제, 성령 안에서의 우리의 삼에 대해 설명한다. 신약의 다른 기록들보다도 바울의 서신들은 더욱 분명하게 구약의 유산들에 이방인 신자들을 포함시킨다. 사도는 교회가 성령 안에서 앞으로 나아가야 하며, 유대교로 돌아서거나 또는 더 이상 복음이 아닌 것으로 복음을 바꾸지 말라고 열심히 강조한다. 이러한 목적들을 이루기 위해서 그는 이방세계에 있는 교회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세계의 수도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로마서를 썼는데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해석하고 아버지께서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모든 은혜를 설명했다. 그리고, 고린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들에서 사도바울은 사도들의 전통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차 있는 사도적 권위를 변증했다. 그리고, 그는 교회의 속성을 더 분명하게 전개하는데,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지만 그 지체들은 다양하며, 은사들은 서로 다르지만 성령은 하나라고 설명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몸의 부활과 하나님의 나라의 완전하 성취를 기대하는 성령충만의 삶이다.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의 자유를 강조한다. 옥중서신들(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쁨과 승리에 가득 찬 한 영혼인 바울을 보면서 인내하는 자에게 주어질 영광을 보여주고 있다. 목회서신들(디모데전후서, 디도서)에서 사도바울은 확실한 교리의 중요성과 사도들의 전통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사도행전과 히브리서, 공동서신의 배경과 대조해서 생각해 보면, 바울 서신들은 구속사 안에서의 중요한 발전 단계를 나타낸다. 한편으로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안 계시고 성령께서 임재하심에 대해 적응해야만 했다. 성령께서는 자유와 성숙함과 더 큰 확신을 주실 뿐 아니라 거룩함과 사랑과 평화, 연합, 영적 갈망 안에서의 더 큰 확신을 기대하신다. 다른 한편으로 교회는 이방인들을 포함시키는데 적응해야 한다.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고, 성령을 받고, 언약적 삶의 모든 권리와 특권을 누리며, 구약성서들을 하나님의 영의 말씀으로 읽고, 지도자의 지위를 주장하는 것이 가능했다. 사도행전과 마찬가지로, 사도바울의 서신들은 오순절과 영광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사이에서 사는 긴장에 대해 증거한다. 그들은 증거들이 될 뿐만 아니라, 정경적인 기능을 갖고 있는데, 각 서신은 성육신하시고 영광을 받으신, 예수의 권위적인 의미를 형성하고 기독교 공동체 전체나 교회의 구성원 개개인들이 성령 안에서의 새로운 삶을 살도록 요청한다.


제33장 예수에 관한 사도들의 메시지

예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그의 교회를 세우셨다. 사도들의 전파에 대하여 사도행전에 기록한 누가의 보고에는 하나님의 종이시며 메시야이신 인자 예수가 메시야 왕국의 영광스런 통치자이시며, 그의 현재적인 통치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다는 예수의 가르침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의 권세는 선지자들의 말의 성취로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가운데 하나님의 영에 의해 완전히 이뤄진다. 사도들의 전파는 천지만물에 대한 예수의 권위를 신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예수의 생애를 증거한 사도 베드로는 예수를 고난의 종이시며 겸손을 통해 메시야직을 입증하신 분으로 말씀하셨다. 둘째로 사도들은 예수의 부활을 통해 그가 하나님의 메시야로서의 영광스런 통치를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다. 셋째로,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승천이 부활이 주는 모든 유익들이 사실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넷째로 사도들은 예수를 주와 메시야시라고 증거한다. 다섯째로, 사도들은 예수의 되심을 인정하면서, 그는 구원의 근원이시고, 성령을 주시는 분이시며, 죄를 사해 주시는 분이시고, 거룩하고 의롭고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증거하고 있다. 여섯째로 예수는 생명의 왕자, 즉 구원자이시고 장차 오실 왕이심을 사도들은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 서신에서 예수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첫째로 바울은 예수의 메시야되심이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분리되어서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면서 예수를 ‘고난의 종’으로 말한다. 하지만 부활하시고 승리하셨기 때문에 영광과 승리의 주로 말한다.

끝으로 공동서신에서는 복음서들과 사도행전, 바울서신의 기독론을 재확인하는 정도이다.


제34장 교회 : 성령 안에서의 예수의 사역

먼저,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 모인 곳이다. 바울의 교회론은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 개념과 연결된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이란 문구와 동의어로 에클레시아가 번역 되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에 대해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성전’ ‘시온’ ‘하나님의 이스라엘’로 비유적인 표현을 쓰고 있다.

이처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백성들이 모인 교회는 곧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 나라는 평화, 기쁨, 사랑, 소망,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는 나라이다. 그리고 연합된 가운데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가 실현되는 곳이 바로 교회이다.

예수그리스도의 교회는 말씀의 전파와 가르침, 성령의 능력의 임재, 이적들의 증거, 그리고 삶의 변화로 세워졌다.


제35장 하나님의 구속사역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통해 속죄를 이루셨다. 속죄의 의미는 통속적인 어학에서 하나됨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속죄의 한면일 뿐이며, 화해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속죄는 갚으심과 화해와 구속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이런 아들의 사역 외에도 아버지의 사역이 있다. 그것은 ‘선택’, ‘부르심’, ‘칭의’, ‘양자’, ‘영화’이다. 선택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시행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목적에 따라 그리스도에 속한 자들을 부르신다. 그리고 그들을 믿음으로 의롭다 칭하신다. 칭의는 아버지께서 용서하신 것이며, 용서받은 죄인에게 완전한 화해와 그에 따르는 모든 유익을 주시는 법적 상황을 말한다. 이렇게 의롭게 한 자기백성을 아버지께서는 양자로 삼으시는데 여기에는 이방인들도 포함된다. 그리고 양자는 영화의 전제조건이다. 즉 양자가 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화로움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께서도 사역하시는데, 그는 중생, 즉 갱신과 회복의 사역을 하신다. 그리고, 성화의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속 이어가신다.

이렇게 해서 변화된 그리스도인은 ‘지혜’, ‘사랑’, ‘자유’, ‘마음의 연합’을 얻게 된다. 먼저 지혜란 성부, 성자, 성령과 함께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 셋째로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피값으로 구속되었기 때문에 자유를 누리게 된다. 끝으로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마음과 마음의 연합을 이루게 된다.

이처럼 구속은 삼위 하나님의 협력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다.


제11부 그 나라와 교회


서론

11부에서 우리는 현재의 복음세계를 형성해 온 사람들과 사건들과 운동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복잡한 문제들, 사람들의 문화적 제약들, 이념들, 운동들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박해 속에서도 일하시며 이단들을 일으켜서 교리들을 깨뜨리기도 하시고, 운동들을 일으키시고 부흥케 하시고 개혁시키시며, 영원한 세계를 위해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성별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목적을 이룩시기 위해 인간들, 나약한 제도들, 문화적 표현들, 분파들과 종파 운동들, 심지어는 세속화까지도 즐겨 사용하신다. 그 백성들은 불완전하고 믿을 수 없지만 그는 여전히 신실하시다.


제36장 세상 속의 교회

기독교는 세상에 적응하는 방법에 대해서 유대 디아스포라에게서부터 전수받았다. 유대인들은 변화하는 세계인 헬레니즘과 로마 제국 모두에 대하여 성서를 적용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했다. 기독교는 먼저 이방인 신자문제에 부딪혔다. 다음으로는 회당과 유대교로부터 점점 분리되어가는데 적응해야 했다. 셋째로,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와 이방 종교의 압박에 대처해 나가야 했다. 교회가 자립하기 시작했을 때, 계속 부딪힌 문제는 적대적인 세상 속에서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었다.

초대교회는 로마제국으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네로, 도미티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데키우스, 디오클레티안의 통치 때 많은 박해를 받았다. 교회는 이러한 혹독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놀랍게 성장했다. 이기간 동안에 변증가 져스틴, 타시안, 터툴리안, 이레니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겐, 키프리안등이 등장했다. 그리고, 초대교회는 기도와 말씀과 공적인 죄의 고백이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의 표현에 있어서 동, 서 기독교가 점차 달라지게 되었고 결국 동상은 동교회의 기독교 신앙전통에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금욕주의 운동이 생겨나 종교개혁 이전까지 기독교에 오래 남아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필요한 신앙적 교훈들을 위해 사도행전과 같은 신조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A.D.313년 기독교가 공인되자 신앙은 자유와 활기를 누리게 되어 은둔자들은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고, 학식이 풍부한 신앙인들도 생겨나면서 많은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했다.

수도원 제도, 금욕주의, 은둔생활, 선교 등은 세속화의 도전에 대해서 기독교적 신앙이 나타내는 공식적인 모습이다. 수도원 운동은 공동 목표를 위해 함께 헌신하게 했다는데에서 긍정적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암흑기 동안 빛을 비추는 등대역할을 했다. 그들은 변화하는 세대에 부응하여 늘어만가는 타협에 근거하지 않고 예수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영적, 학문적, 문화적 혁신의 근거를 제시했다. 그리고, 기독교가 좀 더 적극적으로 펼친 운동의 대표적인 것이 선교운동이다. 하나님나라의 수립에 대한 이런 관심은 선교사들로 하여금 야만민족, 북유럽과 동유럽 선교에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울필라스(311-383), 투어스의 마틴(316-396), 패트릭(389-461), 어거스틴(575. 히포의 사제와 동명이인), 콜룸바(521-597), 보니파체(725), 윌리브로어드(658-739), 안스카르와 또 다른 사람들이 고트, 켈트, 영국, 스코틀랜드, 프랑스, 프러시아, 노르웨이까지 복음을 전했다. 1000년 경에는 서유럽 대부분이 기독교가 되었다.

또한 기독교 문화에 대한 관심 가운데서, 기본적인 기술을 가르치기 위해 교육제도들이 나타났다. 이것이 오늘날 대학제도로 발전했다. 교육, 과학적 탐구, 더 넓은 세계의 발견, 먼 옛날의 보물들의 발견은 서구의 중세문명을 바꾸어 놓았다. 일반인들은 많은 변화들로 실망했겠지만 르네상스의 세계는 종교개혁을 탄생시켰다. 스콜라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신학 사이의 내적 관계에 몰두한 중세운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11c부터 14c까지 스콜라주의는 연합된 체계로 발전되어서 기독교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창출해냈다. 또 하나의 긍정적인 발전이 있었는데 그것은 에크하르트, 타울러, 하나님의 친구들, 독일 신학, 루이스브럭의 요한, 공동생활의 형제단, 빈데스하임의 수도원 등의 가르침을 통하여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교제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15세기가 되어서는 성경이 자기나라 말로 번역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위클리프는 성경번역 뿐 아니라 말씀을 설교하도록 다른 사람들을 훈련시켰다. 종교개혁 이전의 또 다른 지도자들로는 보헤미야의 존 후스와 스페인희 히메네스 데 시스네로스가 있다.

종교개혁은 교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발전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여기에서 루터파, 개혁파, 장로교, 침례교, 영국교회가 발전되었다. 마틴루터가 1517년 비텐베르크 교회의 문에 그 유명한 조항들을 걸어 놓음으로써 종교개혁이 돌발되었다. 종교개혁시대는 새로운 고백서들과 교리문답서들이 활기띠게 발전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형태의 스콜라주의가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개혁운동을 경직시켰다. 시간을 계속 흘렀고 인문주의 정신은 계속 사람들을 자유롭게 했다. 인간들이 받은 은사와 그들의 죄악성에 대한 신념들을 모두 가지고 있었던 개혁자들의 기독교적 인문주의는 인간의 능력과 이성이 무한하다는 주장을 허락하는 인문주의로 발전했다. 계몽정신은 탐구를 통해 세계에서 하나님을 제외시켰고 자연신론을 이끌어냈으며, 임마누엘 칸트는 종교외 이성을 연결시켰다. 세속주의와 인문주읜느 현 세대의 특징이며, 그것은 14세기부터 지금까지 오랜 과정을 거쳐 성장해왔다. 기독교와 인문주의는 함께 있었지만 그들은 서로 속마음을 모를 동료들이었다. 인간에 대한 도취에서 인문주의가 나왔고, 인간에 대한 실망에서 실존주의가 나왔다. 오직 신-인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한다.

개신교 스콜라주의는 복음의 진리와 교회의 순수성에 대한 관심에서 발전되었다. 17-18세기 개신교들은 선교에 거의 관련되지 않았고 세속주의 정신이 점차로 진보하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때 모라비안파는 18세기에 카운트 폰 진젠돌프의 막강한 지도 하에서 루터파 교회와 나중에는 영국교회 내에서 복음주의 운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모라비안파와 같은 때에 미국 식민지역에서는 대각성운동이 있었다. 하나님의 영은 회중교회 목사인 조나단 에드워즈를 사용했고 특히 조지 휫필드를 통해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부흥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웨슬리 형제인 찰스 웨슬리와 죤 웨슬리를 사용하셔서 각계 각층의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부르셨다. 창스는 교회와 감옥에서 설교하면서 7270곡이 넘치는 찬송을 썼다. 죤은 야외 설교자로서, 주로 런던, 브리스톨, 타인 강 위의 뉴캐슬과 같은 곳을 순회했다. 죤은 원래 영적 각성의 불길을 영국교회로 가져가려 했지만 감리교파의 집단들을 형성한 후 감리교회를 발전시켰다. 개신교파들은 교회 밖 운동의 조직들로부터 외부적인 자극을 받은 후에 선교에 대한 괸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모라비안과 대각성운동은 본국에서와 해외에서 복음전도의 필요성을 크게 절감하도록 책임을 부여했다. 선교에 대한 관심은 주된 교파들에서 계속되었고, 타종교 간의 선교도 꽤 유지되었다. 그리고, 세속화, 교육과 사회와 문화에 대한 국가의 간섭이 늘어감에 따라 교회 밖 조직들, 학교들, 대학들이 발달되었다. 그리고 오직 구원에 대한 관심을 갖는 근본주의도 등장하게 되었다.


제37장 교회 안에서의 핵심적인 문제들

예수그리스도의 영이 여러 세기 전체를 통하여 다양한 교리적인 표현들, 동서 간의 차이, 카톨릭과 개신교, 개혁파와 루터파, 다양한 교회 정치 형태들 가운데서 생긴 차이점들 속에서 교회를 보호하셨다. 우리의 독특한 주장들이 강하면 강할수록 우리는 1세기의 교회로 돌아갈 수 없고 오히려 우리와 주장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데 동의하지 않게 될 것이며,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 끼리만 교제를 귀중하게 여길 것이다. 본 장에서는 일곱가지의 핵심적인 문제들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1. 성경의 정경적 권위란 무엇인가?

2. 우리는 성경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3. 우리는 성경해석을 변화하는 세계에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가?

4. 하나님은누구시며,삼위일체의각위(person)들께서는서로어떻게관련을맺고계시는가?

5. 속죄는 어떻게 적용되는가?

6.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하심을 얻는가?

7. 성례들이란 무엇인가?


성경, 하나님, 속죄, 칭의, 성례전과 같은 문제들 이외에도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많은 주제들에 대해서 논의했고 서로 동의하지 않았다.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우리를 함께 묶어주는 공통된 유산을 가지고 있지만, 그 복음적인 유산 안에서 다양성을 가진다. 다양성은 신학, 교회 행정, 그리스도의 경건, 자연과 은혜의 관계와 창조와 구원의 관계와 과거와 현재의 관계와 현재와 미래의 관계에 대한 이해의 모든 면에 까지 확산된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이라는 공통 유산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자유롭게 이 유산을 받았으며 그 유산을 새 세대에게 역동적이고 신선한 방법으로 전해 줄 의무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여호와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전심전력하여 응답하기를 기대하시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 개인들과 회중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안에서 새롭게 되도록 그리고 모든 세대에 복음에 대한 도전들에 응답하도록 계속 변화를 일으키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기를 기대하신다.

 

 

제38장 현재와 미래에 관한 문제들

21세기로 접어들면 교회는 적어도 7가지의 문제들을 대하게 될 것이다.

 

1. 자유적 기독교와 보수적 기독교 내에서 성경의 위치

2. 기독교인의 정치적 사회적 참여

3. 미국의 기독교와 세계 다른 곳의 기독교와의 관계

4. 유대인, 아랍인, 이스라엘 국가의 도전에 직면한 기독교 공동체

5. 기독교 내의 애큐메니칼 운동에 대해

6. 기독교의 문화화

7. 21세기 도전에 복음주의적 기독교가 어떻게 신앙고백을 해 나갈 것인가?

 

 

제12부 새 예루살렘


서론

구속사의 매 시대마다 하나님께서 약속과 언약과 성취에 신실하심을 보여준다. 모든 성경은 창조와 구원 가운데서 우리의 하나님을 드러내는 데 기여한다. 모든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느 하나님의 목적과 관련되어 있다. 그목적은 분명하게 식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믿음의 눈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준비하신 놀라운 미래를 바라보고 있게 된다. 믿음은 우리의 구원을 시작하시고 마치시는 주께 향하는 것이므로 본질상 종말론적이다.


제39장 주의 날

주의 날에 대한 주제는 성경의 역사개념에 혁명적인 변화를 준다. 모든 사건들은 신학적 종말론적 의미를 갖지만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사건들 전체는 역사재구성에 필요한 모든 자료를 제고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구속사는 사건들을 미래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의미를 갖는다.

주께서는 다가올 구원의 성격에 대해 점차로 분명하게 하셨다. 구약의 증거들은 수평적 차원에서의 미래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현재의 이 세상이 재창조되어야 한다는 혁신적인 가르침으로 움직인 것 같이 보인다. 모든 것들은 악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 심판, 의로운 자들에 대한 보호와 구원과 상급, 새 하늘과 새 땅의 설립의 순간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우리는 모세에서부터 세례요한까지의 다양한 강조점들, 주의날에 대한 선지자의 메시지, 하나님의 나라, 교회, 이스라엘에 대한 개념을 알아야 한다.


제40장 종말론과 그리스도인의 삶

종말론은 성경이 미래에 관하여 말하는 모든 것들의 종합이다. 성경은 미래에 관한 주제를 하나님, 주 예수, 성령, 하나님의 백성,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구원과 성화, 하나님의 계시의 성격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과 서로 연결시켜서 다룬다. 성경의 종말론에 대한 우리의 주된 관심은 성서의 목적들 안에서 부터 나온다. 모세와 선지자들돠 예수와 사도들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는 교육, 격려, 권고라는 3가지 기본적인 목적들을 가지고 있다. 성경에서 미래에 대하여 가르치는 것은 소망과 위로를 주며, 우리 주님을 따르는 응답의 삶을 요구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구속의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활동하시고, 계시하시는 장엄한 계획을 말해 준다. 기독교 신앙은 본질적으로 종말론적이며 또 기독론적이다. 기독론 없이 종말론은 없으며 마찬가지로 종말론 없이는 기독론도 없다.

유감스럽게도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해석의 세밀한 세부 사항들에 있어서 의견이 맞지 않으며 더 유감스러운 것은 복음주의를 특별한 천년주의적 관점이라는 표현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흐린 거울로 보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입장에 서서 한 지평선에서는 영원을 또 다른 지평선에서는 성경해석을 바라볼 수 있는 서로 다른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미래나 선지자들의 말에 대한 해석에 무관심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그 복된 소망에 관한 이유들을 드러내며 서로를 격려하도록 명 받았다. 이러한 목적에서 성령은 우리 안에서 다가올 구원을 더 깊이 갈망하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와 함께 우리는 외치도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마라나타!”



<서평>



1 구속사와 하나님 나라 중심의 성경신학

게할더스 보스의 책만 읽었을 때는 교수니께서 두권을 읽으라시는 의도를 몰랐는데, 벤게메렌의 책을 다 읽고 나니, 그 의도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우리 교단에서 받아들이는 성경신학은 계시중심의 성경신학과 하나님 나라 중심의 성경신학이다. 계시중심의 성경신학의 대표적인 책이 앞에서 소개한 게할더스 보스의 책이고, 하나님 나라 중심의 성경신학 책이 바로 벤게메렌의 책이기 때문에 두권을 읽으라고 하셨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처럼 벤게메렌의 책은 철저하게 하나님 나라 중심의 성경신학책이다. [9부 예수와 하나님 나라]에서는 예수의 복음이 사복음서에서 어떻게 소개되고 있는지를 이야기한 후, 요한과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예수님의 속성을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 인자, 구원자, 다윗의 자손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회복될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왕이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시며, 완전으로 향해가는 나라임을 소개하면서 그 나라의 상속자가 되기위한 기준을 소개한 후, 하나님 나라는 현쟁성과 미래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운을 땐 하나님 나라는, [10부 사도시대]를 통해 구체화 된다. 벤게메렌은 먼저 사도들과 바울이 증거하는 예수님을 소개한 후, 사도시대에 세워진 교회가 곧 하나님 나라이고, 이 교회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의 사역 위에 세워지고 있음을 소개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구속사역이 진행되고 있음을 소개하고 있다. [11부 그 나라와 교회]에서는 사도시대에 출발한 교회가 교부시대, 중세시대, 근대, 현대를 거치면서 어떠한 형태로 유지 발전되었는지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면서 교회안의 핵심적인 7가지의 문제와 교회가 안고 있는 현재와 미래에 관련된 7가지의 문제를 소개하면서 복음주의적으로 어떻게 접근해 가야 할 것인간에 대해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다. 끝으로 [12부 새 예루살렘]에서는 하나님 나라와 구속사 중심에서 종말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를 소개하고 있다. 구속사는 결국 종말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종말 때가 가까워 질 수록 구속사는 뚜렷하게 보일 것을 말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마지막으로 벤게메렌은 아직 구체적이지 않은 문제들을 가지고 자신의 독단적인 주장을 내세우고, 상대를 비방하여 편을 가르는 기독교의 행태를 비판하면서, 서로를 관용하고 격려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2 성경신학의 현대적 조명

이 책을 읽으면서 먼저 든 생각은, 매우 쉽게 쓰여졌다는 것이다. 게할더스 보스의 책을 읽을 때는 내용이나 번역이 어려워서 다시 돌아가서 읽곤 했는데, 벤게메렌의 책은 내용이 쉽게 기술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내용이 오늘날 시대와 맞물려 간다는 것이 우리를 더 빠져들게 만들었다.

벤게메렌의 성경신학은 구속사와 하나님 나라가 성경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현대에 아니 미래, 종말에 까지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는 앞에서 게할더스 보스의 책의 단점과 정 반대되는 점이다. 하나님의 계시와 구속, 하나님 나라는 성경과 초대교회 시대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까지도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벤게메렌은 하나님의 계시와 구속사역, 하나님 나라가 초대교회를 넘어, 로마의 박해에서는 어떻게 나타났는지, 313년 공인 후에는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종교의 암흑기와 종교개혁기에는 어떻게 작용했는지, 인문주의, 계몽주의, 실존주의 시대와 부흥운동시기, 그리고 오늘날 에큐메니칼 운동의 시대에는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그리고, 구속사와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구속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것인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매우 잘 전달하고 있다. 이것이 이 책이 지니는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생각된다.

둘째로, 이 책의 양념과 같은 역할이라고 한다면, 현대 기독교 속에서 나타나는 신학적 문제들과 교회 일치 운동의 현상 속에서, 보수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어떤 해답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에 대해,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개괄적인 소개를 하고 있다는 것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는 마치 책임감 있는 보스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자신은 다 갖추었어도 부족한 아랫사람들을 위해 꼼꼼히 챙기는 보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3. 성경신학의 핵심 “계시” “구속사” “하나님 나라”

벤게메렌 책이 여러 가지 장점에도 불구하고, 게할더스 보스의 책도 벤게메렌의 책이 갖지 못한 장점들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요즘 수업 시간에 배우고 있는 수업의 내용이 증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신약성경신학] 수업 시간을 들여다 보면, 세례요한의 계시, 사복음서에 나타나는 계시를 살필 뿐 아니라, 사복음서에 나타나는 구속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도 살피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성경신학이 변증학, 신구약 계론, 주석, 조직신학, 역사신학, 교리사 등 인접학문들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어정쩡한 학문의 한 부류이기는 하지만, 그 속의 핵심은 “계시”, “구속사”,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신학이라는 학문이 자칫, 역사신학처럼 성경의 사건들을 나열할 수도 있고, 신구약 계론처럼 성경 각권에 대한 연구로 치우칠 수도 있으며, 역사신학이나 교리사처럼 성경 이후 나타난 기독교 세계를 탐구하는 쪽으로 치우칠 수도 있고, 변증학처럼 성경 속에 나타난 민감한 부분들을 토의 하는 장이 될 수도 있는 위험요소를 지니고 있지만, 그 위험에 빠지지 않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계시’, ‘구속사’, ‘하나님 나라’가 아닌가 생각된다.

성경신학을 더 배워가야 할 우리들도, 성경신학에 대한 독특성을 파악하고 성경신학을 바른 관점에서 배우고 익혀 나가야 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