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연구
1) 단어연구, 문법연구 및 사역(私譯)
<벧전 3:13>
Kai; tiv" oJ kakwvswn uJma'" eja;n tou' ajgaqou' zhlwtai; gevnhsqe
(1) 단어, 문법연구
① Kai'
-등위 접속사 / ‘그러므로’, ‘따라서’
-앞의 성구와 연결시키는 의미의 접속사이다. 즉, 12절에 하나님의 눈이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가 의인의 간구에 기울여진다면, 13절에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선을 행하는 자들을 해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의미가 된다.
② agaqou'
-ajgaqov" / 대명사적 형용사, 소유격 중성 단수
-좋은 성품이나 기질의 / 이로운 / 좋은, 즐거운, / 우수한, 발군의 / 정직한, 명예로운
③ kakwswn
-kakovw / 동사, 미래형 능동태, 주격 남성 단수
-'해를 끼치다', 상징적으로 '노하게 하다', 악한 영향을 미치다, 악하게 대하다
-육체적인 고통을 준다는 의미 뿐 아니라 도덕적, 영적 의미에서 나쁜 영향을 끼친다는 뜻이 담겨 있다.
④ zhlwtai;
- zhlwthv" / 명사, 주격 남성 복수
-열광자 / 열심히 불타는 사람 / 열심당원
-열심당운동과 연관시킬 이유는 없다. 이 단어는 단지 선한 일을 열심히 추구하거나 헌신하는 자들을 가리킬 따름이다.
(2) 본문 사역(私譯)
“여러분들이 열심히 좋은 일을 한다면 누가 해치겠습니까?” |
<벧전 3:14>
ajll! eij kai; pavscoite dia; dikaiosuvnhn, makavrioi. to;n de; fovbon aujtw'n mh; fobhqh'te mhde; taracqh'te,
(1) 단어, 문법연구
① all!
-ajlla / 우위 접속사 / ‘그러나’
-이 접속사의 목적은 23절에 나오는 “해를 받지 않는 것”에 대한 확신과 대비를 설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확신을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즉 너희를 아무도 해하지 못할 것을 강조하는 뜻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② pascoite
-pavscw / 희구법 현재형 동사 / 2인칭 복수
-감각, 고통을 체험하다 / 고난을 당하다
-pavscw는 희구법 현재형인데 조건 접속사 ei와 함께 나와 가정법으로 쓰였다. 여기서는 지금 받고 있는 박해를 포함하여 가까운 시일 내에 실제로 박해가 일어날 것을 가정하고 있다.
③ makarioi
-makavrio" / 형용사 / 주격 남성 복수
-행운의, 복된, 축복된
-고난은 힘든 것이다. 그러나 의를 위한 고난은 행복이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 행복의 개념은 결코 현세적이거나 세상적인 것이 아니다.
④ fobon
-fovbo" / 목적격 명사 / 남성 단수
-두려움, 불안 공포 / 남편에 대한 공경
-fovbo"를 ‘두려움’ ‘공포’라고 보지만, NASB, NIV의 난하주, 공동번역에 보면 “공포심을 불어 넣는 것”으로 나온다. 이를 받아들여 번역하면 자연스러운 번역이 된다. 즉 의를 위한 고난은 복된 것이므로 박해자의 위협이 있더라도 성도는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⑤ taracqhte
-taravssw / 가정법 동사 / 과거 수동태 2인칭 복수
-자극하다, 선동하다
-mhde;taracqh'te는 ‘동요되지 말라’ ‘흔들리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핍박의 현실과 박해자의 협박 속에서 하나님이 즉각 개입하지 않는다 하여도 흔들리거나 동요되지 말라는 바울의 권면이다.
(2) 본문 사역(私譯)
“그러나, 의를 위해 고난을 당한다면은 여러분은 복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공포심을 불어 넣더라도 겁을 내거나 흔들리지 마시고....” |
<벧전 3:15>
kuvrion de; to;n Cristo;n aJgiavsate ejn tai'" kardivai" uJmw'n, e (toimoi ajei; pro;" ajpologivan panti; tw'/ aijtou'nti uJma'" lovgon peri; th'" ejn uJmi'n ejlpivdo",
(1) 단어, 문법연구
① kurion de;ton Criston
-‘주이신 그리스도’
-to;n Cristo;n을 kuvrion의 동격으로 보아서 ‘주 그리스도’로 번역할 수도 있고, 반대로 ‘그리스도 주’로 번역할 수도 있다. 또는 to;n Cristo;n을 aJgiavsate의 직접목적어로 보고, kuvrion을 서술적 대격으로 보아서 “주이신 그리스도”라고 번역하는 것도 가능하다.
-여기서 베드로의 의도는 주와 그리스도를 동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주가 그리스도이심을 환기시켜 주는데 있다. 그러므로 ‘주이신 그리스도’라고 해석하는 것이 맞는 해석일 것이다.
② agiavsate
- aJgiavzw / 명령형 동사 / 과거 능동태 2인칭 복수
-존경하다, 경배하다 / 거룩하게 하다, 깨끗하게 하다 / 속죄를 통해 정화하다.
-‘거룩하게 하라’라고 번역된 aJgiavsate는 ‘거룩하게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거룩하다고 선언하라’ 또는 ‘인정하라’는 의미이다.(J.R. Michaels). 본래 거룩하신 분을 거룩하게 할 필요는 없다. 다만 불신자들, 박해자들에게 거룩함이 알려져야 할 뿐인 것이다.
③ ajpologian
-ajpologiva / 목적격 명사 / 여성 단수
-변론, 방어하는 말
-이 용어는 법정에서 구체적인 고소들에 대하여 공식적인 변호를 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사용된다.
(2) 본문 사역(私譯)
“여러분들 마음 속에 기름부음을 받아 세워진 주님의 거룩하심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들 마음 속에 있는 소망을 질문하는 자들에게 공손하고 부드럽게 변론할 말을 준비하고.....” |
<벧전 3:16>
ajlla; meta; prau?thto" kai; fovbou, suneivdhsin e[conte" ajgaqhvn, i +na ejn w|/ katalalei'sqe kataiscunqw'sin oiJ ejphreavzonte" uJmw'n th;n ajgaqh;n ejn Cristw'/ ajnastrofhvn.
(1) 단어, 문법연구
① suneidhsin
-suneivdhsi" / sun(공통의)+eivdw(인식하다) / 목적격 명사 / 여성 단수
-공통된 인식, 공통된 지각, 도덕적 의식 / 양심
-사람의 죄된 본성으로 옳은 것이 흐려질 수 있다. 그것을 지켜주는 것이 공통된 인식인 것이다. 공통된 인식, 지각이 곧 양심인 것이다.
② katalaleisqe kataiscunqwsin
-“비방으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고......
-그리스도인들을 비방하는 자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대신 끈질기게 비방을 계속한다. 그 결과 그들은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대신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란 말이다. 구약과 유대교 문헌에서 “부끄러움”은 흔히 전투에서 또는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패배를 당하여 수치를 겪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시편기자들과 마찬가지로 베드로는 종말론적 상황의 역전을 내다보고 있는 것이다.
(2) 본문 사역(私譯)
“선한 양심을 가지십시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들을 욕하는 자들이, 그 욕하 는 것으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
<벧전 3:17>
krei'tton ga;r ajgaqopoiou'nta", eij qevloi to; qevlhma tou' qeou', pavscein h] kakopoiou'nta".
(1) 단어, 문법연구
① kreitton
-kreivttwn / 형용사 비교급 / 주격 중성 단수
-'더 강한', (상징적으로) '더 잘', 즉 '귀족', 가장 좋은, 더 좋은
② qelhma
- qevlhma / 주격 명사 / 중성 단수
-결정, 선택, 뜻
(2) 본문 사역(私譯)
“착한 일을 해서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악한 일을 해서 어려움 을 당하는 것 보다 낫습니다..” |
<사역(私譯) 종합>
[13] 여러분들이 열심히 좋은 일을 한다면 누가 해치겠습니까? [14] 그러나, 의를 위해 고난을 당한다면 여러분은 복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공포심을 불어 넣더라도 겁을 내거나 흔들리지 마시고 [15] 여러분들 마음속에 기름부음을 받아 세워진 주님의 거룩하심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들 마음속에 있는 소망을, 질문하는 자들에게 공손하고 부드럽게 변론할 말을 준비하고 [16] 선한 양심을 가지십시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들을 욕하는 자들이, 그 욕하는 것으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17] 착한 일을 해서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악한 일을 해서 어려움을 당하는 것 보다 낫습니다. |
2) 문학적 연구
(1) 문학형태
베드로전서는 신약성서의 전형적인 서신형식으로 쓰여진 서신, 즉 하나의 편지이다. 많은 학자들이 베드로전서에서 신조적 혹은 성가적(聖歌的) 단편들을 분류해 내거나 파악해 내기 우해 연구해 왔다. 베드로전서에는 설교 혹은, 훈계, 부활절 기도문, 혹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교리문답 등의 내용이 들어 있음이 밝혀졌다.
본 서신의 수사학적이고 교훈적인 성격으로 볼 때 이 서신은 회중들로 하여금 큰 소리로 읽도록 하려는 의도에서 씌어졌는지도 모른다.
(2) 구조
1. 문안 (1:1-2)
2. 구원의 특권과 책임 (1:3-2:10)
(1) 하나님의 구원계획 (1:3-12)
a. 구원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 (1:3-9)
b. 구원의 예언 (1:10-12)
(2) 구원받은 자의 생활 양식 (1:13-25)
a. 소망과 경건의 생활 (1:13-16)
b.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 (1:17-21)
c. 사랑의 생활 (1:22-25)
(3) 구원받은 자의 성장 (2:1-10)
a. 순수한 젖을 통한 성장 (2:1-3)
b. 성전을 세우는 일과 제사장직에의 참여 (2:4-10)
-반석 되신 그리스도와 산 돌인 그리스도인 (2:4-8)
-제사장들의 나라 (2:9,10)
3. 그리스도인의 복종과 하나님의 영광 (2:11-3:12)
(1) 선한 생활과 하나님의 영광 (2:11,12)
(2) 그리스도인의 순복의 의무 (2:13, 3:7)
a, 인간이 세운 제도에의 순복 (2:13-17)
b, 주인에 대한 사환의 복종 (2:18-25)
-고용된 사환의 복종(2:18-20)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복종의 본보기 (2:21-25)
c, 그리스도인 아내의 복종 (3:1-6)
d, 그리스도인 남편의 의무 (3:7)
(3) 의로운 삶으로의 부르심 (3:8-12)
4. 그리스도인들의 고난과 박해 (3:13-5:11)
(1) 의를 위하여 받는 고난의 축복 (3:13-17)
(2) 그리스도께서 몸소 보이신 고난과 높이 들리우심 (3:18-22)
(3) 옛 생활의 종식 (4:1-6)
(4)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 (4:7-11)
(5) 고난 중에서의 위로 (4:12-19)
(6) 목자의 고난 받는 양떼 (5:1-4)
(7) 고난 중에서의 겸손과 깨어 있음 (5:5-9)
(8)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5:10,11)
5. 작별인사 (5:12-14)
(1) 본서를 쓰는 데 있어서의 실라의 역할 (5:12)
(2) 로마로부터의 문안 인사 (5:13)
(3) 마지막 권면과 신앙심에서 우러난 기원 (5:14)
(3) 본문 “베드로 전서 3:13-17”의 구조
a. 원래 열심히 선을 행하면 해하지 않았다 (3:13)
b. 지금은 선을 행하여도 고난을 받는다. (3:14)
c. 세상 앞에 당당한 그리스도인의 세 가지 모습 (3:15-16)
d.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3:17)
3) 역사적 배경 연구
(1) 저자
베드로전서는 서두인 인사말에서 저자 자신을 가리켜 “에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1:1)라고 하였으며,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5:1)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서신은 저자 자신이 “신실한 형제....실루아노로 말미암아”(5:12) 기록했다고 하였다.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실루아노는 사도행전 15:22과 데살로니가전서 1:1의 “실라”를 말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또한 베드로전서 5:13에 언급되어 있는 “마가”는 사도행전 12:12에 언급되어 있는 “마가라 하는 요한”과 같은 인물인 것 같다. 이러한 언급들이 병행하여 기록되어 있고, 그 당시 교회가 이 서신을 일찍이 진지하게 받아 들였기 때문에(참고 Bigg, p15) 오늘날까지도 베드로전서는 베드로에게서 온 서신으로 거의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잇다.
(2) 기록연대와 장소
클레멘트서 5:4-7은 박해의 희생자로 베드로와 바울의 이름을 들고 있다. 이 구절은 대개 로마의 황제 네로에 의해 행해진 박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참고 IDB, 3:755). 이 박해는 A.D. 64년 7월 19일에 로마시에 화재가 발생한 다음에 시작되었다. 베드로전서는 “바벨론”에서 씌어졌다(5:13). 바벨론은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계17:18)으로 로마를 암시한 말인 것 같다.
베드로전서가 진정으로 베드로의 편지라면, 본 서신은 네로의 대박해가 있기 직전인 A.D.62-64년에 아마 로마에서 씌어졌을 것이다.
(3) 수신인
바울이 소아시아의 남쪽과 서쪽지역에서 교회를 세웠던 반면, 베드로는 소아시아의 북쪽지역에서 복음을 전했던 것 같다. 실라도 또한 이 북쪽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던 것 같다. 그곳의 교회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되어 있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이 지역에는 유대교인들보다 그리스도인들의 수가 많았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깨닫지 못한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베드로전서 4:3,4은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유대교로부터 개종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우상숭배로부터 개종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 해 주고 있다.
(4) 동기와 목적
베드로전서의 어조(語調)는 온화한 목회적인 어조, 즉 격려로 가득찬 어조이다. 넓은 지역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권면의 글이 보내졌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서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공통된 문제에 직면했다. 그들의 기본적인 문제는 참된 하나님을 모르는 무리들 속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었기 때문에, 오해를 받아야 했고 불의한 대접을 받아야만 했다.
베드로가 이와 같이 목회적인 성격을 띠 편지를 보낸 목적은, 이러한 초대교인들로 하여금 현재 당하는 그들의 고난을 앞으로 올 영원한 영광의 충만한 빛에서 볼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온갖 실망 중에서도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켜 주시고 그분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실 것이다. 고난 당하히고 영광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하나님을 따르는 본(本)이 되어 주셨고, 또한 산 희망이 되셨다. 이교도들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므로 베드로는 그들에게 겸손과 순종을 권면했다.
가까운 미래에 교회와 세계와의 충돌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있다(4:7,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셔서 믿는 자들의 신앙을 성숙하게 해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양떼 중에서 하나라도 상처 받지 않도록 서로 도우며 사랑의 관심을 보여야 한다.
4) 신학적 연구
베드로전서는 하나님의 주권사상에 기초한 성서적 세계관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 세계는 하나님의 세계이다. 그러나 마귀는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5:8)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악한 욕망, 무지, 무분별한 우상숭배, 그리고 온갖 형태의 죄악된 삶을 살기 쉽다. (1:14, 4:3,4)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들의 죄를 회개할 시간을 허락해 주시지만 회개할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우시다(5:2,10)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또한 산 자와 죽은 자 모두를 그들의 행실에 따라 심판하러 오실 정의롭고도 거룩한 심판자이시다.(1:17, 2:12,23, 4:5,6,17-19)
신약성서에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처럼, 베드로전서도 새로운 종말론적인 전망을 보이고 있다. 예수께서 메시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서 성취되었다.(1:11,12) 베드로전서에서 예언자적 가르침의 두가지 주요한 주제는 메시야의 고난과 그에 뒤따르는 메시야의 영광이다. 메시야의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이미 이루어졌다. 예수께서는 죽으시고 이제 부활하신 고난의 종이시다. 때가 가까이 왔다. 예수께서는 곧 이 세상에 오셔서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에게 하늘의 영광을 주셨다(1:21) 이 세상은 영광의 주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실 마지막 때를 기다리고 있다.(1:7,13, 4:13)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순종하지 않는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이다.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1:2)께서는 역사 속에서 구속의 계획을 이루어 가고 계신다(1:20) 아버지 하나님의 역할은 무한하시며(1:1-3,5,15,20,21), 인격적이시며, 우리들 가까이에 계신다. 인간의 구원에 성령의 관여하심이 또한 나타나 있다(1:2,11,12 4:14). 그러나 신약성서 다른 곳에서처럼 베드로전서의 초점은 메시야에 있다.
베드로는 예수를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로 언급하고 있다.(1:1-3,7,13, 2:5) “예수 그리스도”란 말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그 당시 교회의 신앙고백을 나타내고 있다.(참고 마16:16 이하). 베드로는 또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며 예수의 승천을 인정하고 있다. 베드로는 메시야의 선제설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이 예언자들에게 임하였으며(1:11),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되셨다(1:20)고 선포하고 있다. 베드로는 시편 34:8을 인용하여 메시야의 신성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시편 34:8에서는 메시야를 “주님”으로 칭하고 있으며 이 주님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야웨에 해당한다. 그리고 어린양(1:19), 산돌(2:4),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2:25), 목자장(5:4)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의 수난 안에서 구약성서의 상징들과 예언들을 서우치하셨다. 예수는 출애굽기의 힘업슨 유월절 양이고(1:16-21) 이사야 53장의 수난의 종이며(2:24,25) 레위기의 속죄양이다(2:24a) 예수께서는 세상 죄를 지시고 대속하셔서 의로운 새 생명을 주셨다. 예수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을 뿐만 아니라(2:24),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이 되셨다. 예수님은 고난의 종이셨기 때문에, 그분을 따르는 자들도 역시 예수의 고난을 받아야만 한다.(2:21)
주석가들은 베드로전서와 바울서신이 신학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종종 밝혀 왔다.(참고, Beare, p44 Selwyn p.36 이하) 즉 베드로는 바울 서신을 알고 있었으며 높이 평가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베드로후서 3:15,16을 고려해 보면, 이 두 서신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베드로와 바울 사이의 연관성을 베드로가 바울에게 의존했다고 생각했던 베어처럼 과장해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베드로전서는 유대인의 율법과 이방 그리스도인에 대한 할례의 관계와 신앙 의인에 대한 바울 서신의 위대한 강조점을 조금도 보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베드로전서는 고난 중에서도 경건하게 살아갈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뚜렷이 목회적인 어조를 취하고 있다. 베드로전서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주 귀중한 가치가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아직도 적의에 차 있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어떤 곳에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 받고 있다. 그리스도를 위해 신앙적인 증언을 함으로써 독재적인 정권 아래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더 자유로운 사회에서도 큰 고난을 당할 수 있는 것이다.
5) 본문 주석
<의를 위하여 받는 고난의 축복 (3:13-17)>
“13절 : 또 너희가 열심히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이 부분은 3:12와 연결되고 있다. Kai'는 등위 접속사로 ‘그러므로’, ‘따라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앞의 성구와 연결시키는 의미의 접속사이다. 즉, 12절에 하나님의 눈이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가 의인의 간구에 기울여진다면, 13절에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선을 행하는 자들을 해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해를 끼치다‘는 뜻을 가진 kakwvswn는 육체적인 고통을 준다는 의미 뿐 아니라 도덕적, 영적 의미에서 나쁜 영향을 끼친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리고, ‘열광자’, ‘열심히 불타는 사람’, ‘열심당원’이란 뜻을 가진 zhlwtai;는 열심당운동과 연관시킬 이유는 없다. 이 단어는 단지 선한 일을 열심히 추구하거나 헌신하는 자들을 가리킬 따름이다.
한국 속담에 ‘웃는 얼굴에 침 못 벧는다.’는 말이 있다. 왜 기독교인들이 사회에서 치탄의 대상이 되고, 육체적 핍박만이 아닌 영적인 핍박의 대상이 되어야만 하는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거대한 명령 중의 하나인, 선을 행하는 삶, 이웃을 섬기는 삶에 둔감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전도, 영적 부흥, 교회의 성장이 회복되어야 하는 것 보다 열심히 선을 행하는 모습이 필요함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14절 :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그러나’로 해석되는 접속사 ‘ajlla’는 23절에 나오는 “해를 받지 않는 것”에 대한 확신과 대비를 설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확신을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즉 너희를 아무도 해하지 못할 것을 강조하는 뜻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pavscoite는 희구법 현재형인데 조건 접속사 ei와 함께 나와 가정법으로 쓰였다. 여기서는 지금 받고 있는 박해를 포함하여 가까운 시일 내에 실제로 박해가 일어날 것을 가정하고 있다. 그리고 ‘행운의’, ‘복된’으로 해석되는 makavrioi는 결코 현세적이거나 세상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고, 두려움, 공포의 뜻을 가진 fovbon은 NASB, NIV의 난하주, 공동번역에 보면 “공포심을 불어 넣는 것”으로 나온다. 이를 받아들여 번역하면 자연스러운 번역이 된다. 즉 의를 위한 고난은 복된 것이므로 박해자의 위협이 있더라도 성도는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taracqh'te는 가정법 동사인데, ‘동요되지 말라’ ‘흔들리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즉, 핍박의 현실과 박해자의 협박 속에서 하나님이 즉각 개입하지 않는다 하여도 흔들리거나 동요되지 말라는 바울의 권면이다.
우리는 선을 행하더라도 의를 위해 고난을 받을 수 있음을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해 말한다. 그것은 비록 이 세상에서의 행복은 될 수 없지만, 천국에서의 상급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불어 넣는 자들이 있을지라도 동요되거나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15절 :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먼저 kuvrion de; to;n Cristo;n에 대한 해석의견이 분분하다. to;n Cristo;n을 kuvrion의 동격으로 보아서 ‘주 그리스도’로 번역할 수도 있고, 반대로 ‘그리스도 주’로 번역할 수도 있다. 또는 to;n Cristo;n을 aJgiavsate의 직접목적어로 보고, kuvrion을 서술적 대격으로 보아서 “주이신 그리스도”라고 번역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여기서 베드로의 의도는 주와 그리스도를 동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주가 그리스도이심을 환기시켜 주는데 있다. 그러므로 ‘주이신 그리스도’라고 해석하는 것이 맞는 해석일 것이다. 그리고, ‘존경하다. 거룩하게 하다’로 해석되는 aJgiavsate는 거룩하게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거룩하다고 선언하라’ 또는 ‘인정하라’는 의미이다.(J.R. Michaels). 본래 거룩하신 분을 거룩하게 할 필요는 없다. 다만 불신자들, 박해자들에게 거룩함이 알려져야 할 뿐인 것이다. 그리고, ‘변론, 방어하는 말’이란 뜻을 가진 ajpologivan는 법정에서 구체적인 고소들에 대하여 공식적인 변호를 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사용된다.
선한 일을 행하는 자를 해하지 않는 것이 정상인데, 선을 하나님의 의를 행하는 우리에게도 두려움을 불어 넣는 자들이 있다. 물론 이러한 것이 천국에서 복된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그 정답을 하나님은 베드로 사도를 통해 15절에서 말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예수를 주로 모시고 그분을 거룩하다고 인정하는 마음의 기본자세를 가지고, 고난 중에도 인내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소망을 묻는 자들에게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변론할 것을 준비해 두어야 하는 것이다. 무작정 당하기만 하고, 착하게만 굴지 말고, 내게 확신을 세운 뒤에 나의 소망을 설명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 두가지 요소가 다 있는가? 주장이 있는 자는 선한 행실이 없고, 선한 행실이 있는 자는 주장이 없는 것이 요즘 기독교인들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는 비둘기처럼 삶 속에서 순결해야 겠지만 뱀처럼 지혜로운 변론을 품고 있을 필요가 있다. 이것이 천국의 상급을 향해 살아가는 기독교인의 바른 삶의 모습일 것이다.
“16절 :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보통 ‘양심’으로 해석하는 suneivdhsin은 sun(공통의)와 eivdw(인식하다)의 합성어로서 ‘공통된 인식, 공통된 지각, 도덕적 의식’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이는 사람의 죄된 본성으로 옳은 것의 기준이 개인적이라면 쉽게 흐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지켜주는 것이 공통된 인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공통된 인식, 지각이 곧 양심인 것이다. 그리고, katalalei'sqe kataiscunqw'sin은 ‘비방으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고....’로 해석되데, 그리스도인들을 비방하는 자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대신 끈질기게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님을 향해 비방을 계속한다. 그 결과 그들은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대신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란 말이다. 구약과 유대교 문헌에서 “부끄러움”은 흔히 전투에서 또는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패배를 당하여 수치를 겪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시편기자들과 마찬가지로 베드로는 종말론적 상황의 역전을 내다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베드로 사도를 통해 다시 한번 선을 말하는데 이번에는 선한 양심을 말씀하신다. 우리 개인의 판단기준이 아닌, 공통의 인식에서 나온 선한 인식을 가지고 끝까지 지켜야 하는 이유는, 주님과 그리스도인들을 비방하는 자들에게 물들지 않고, 끝까지 지켰을 때 그들이 자신들의 비방으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시려고 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이 부끄러움은 마치 전투에서 패하여 겪는 수모와 같다고 말하고 있다. 이 얼마나 통쾌한 장면인가? 우리의 삶 속에는 이런 삶의 방식이 녹아져 있어야 한다. 나는 잘못이 없는데 피해를 보거나, 나는 잘못이 없는데 비난하는 자들을 향해 똑같은 목소리로 비난한다면, 그것은 살인자를 절도죄로 몇 년 살고 나오게 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낳는 것이다. 선한 양심을 가지고, 비난을 꿋꿋히 이겨 나가고, 심판자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할 때, 우리는 선한 결과를 맺고 통쾌한 복수를 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한 방법으로 세상을 살아가야겠다.
“17절 :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kreivttwn의 형용사 비교급으로 '더 강한', (상징적으로) '더 잘', 즉 '귀족', ‘가장 좋은’, ‘더 좋은’의 뜻을 가진 krei'tton은 같은 고난을 받는다고 보았을 때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중 어떤 것이 가치 있는지를 비교해서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qevlhma는 ‘결정’ ‘선택’ ‘뜻’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통해, 13절의 주장을 다시 한번 반복시키고 있다. 즉, 우리는 선을 행하여 악인에게 고난을 받는 것이나, 악을 행하여 종말 때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 것, 즉 고난을 받는 것은 정해져 있는 것인데, 과연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이 가치 있는 것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산다는 것은 어차피 힘든 것이고, 인생은 한번 정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가치 있는 쪽으로 미래를 대비하는 쪽으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철학적인 물음 통해 하나님의 선한 뜻을 쫓아 살아갈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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