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칼럼] 타협의 시대

주전담백 主前淡白 2018. 6. 29. 09:55



김윤희 경원대 교수는 그의 저서 <이완용 평전>(한겨레출판, 2011)에서 매국노 이완용을 합리적인 근대인이라는 기준으로 다시 봐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이 책보다 훨씬 일찍 출간된 윤덕한 기자의 <이완용 평전>(중심, 1999)은 이완용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는 것은 역사의 이지메라면서, 러일전쟁 후 국운이 기우는 기세가 확실해지자 나라를 보존하기 위한 타협의 결과물이 이완용의 결정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평가가 과연 올바른 것일까요? 이완용의 이런 결정은 근본적으로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나라 전체의 운명을 개인의 판단에 의해 일본의 보호조약 강요로 몰고 갔기 때문에 어떤 변명을 한다고 해도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타협이라는 말은 상식적이고 합리적이며 현대사회에 맞는 행동양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의 의견을 절충하여 가급적이면 다투지 않고 큰 소리 내지 않고 평화롭게 지내는 것이 좋다고들 생각합니다. 그러나 평화와 타협이 절대적인 가치가 되어져 버릴 때 우리는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만약 이완용이 평화가 아닌 전쟁을 선택했다면 일제강점기는 없었거나 이처럼 치욕스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두고 타협하지만 않았다면 이 나라는 훨씬 더 정의로운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공무원들과 기업인들이 서로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타협하지 않았다면 이 나라는 훨썬 더 투명한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정답이 없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필수 조건은 타협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목숨, 가족, 나라처럼 타협할 수 없는 것들은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신앙은 타협 할 수 없는 것임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타협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말씀과 신앙생활이 타협의 대상이 되는 순간 우리의 구원은 흔들리게 되고, 사람들은 우리의 신앙을 비웃게 되며, 마귀는 더 이상 우리를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절대가치로 놓고 고난을 당하는 사람은 실상은 승리하는 사람이요, 가장 멋진 사람인 것입니다. 당신은 어떠합니까?

-무익한 종 박희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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