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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목사와 설교 (마틴 로이드존스)

주전담백 主前淡白 2006. 6. 29. 15:21

 

 

 

<책 요약>

 

 

제1장 설교의 우위성


1) 설교의 위기

  (1) 설교자가 아닌 설교꾼들이 강단을 지배하고 있다.

  (2) 가식적 설교주의 (Pulpteerism)로 알맹이는 없어지고 웅변, 능변이 되어 버렸다.

  (3) 예배에서 설교를 연설이라고 하기 시작했다.

  (4) 예배의식에 더 큰 강조점을 두기 시작했다.

  (5) 공적예배에 흥미본위의 요소가 증가되었다. (간증, 상담)

2) 이적은 하나의 표적이다. 증인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인 것이다.

3) 말씀은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 권위이자 첫번째 임무이다.

4) 위대한 설교자들

   (1) 종교개혁기 : 루터, 칼빈, 낙스, 래티머, 리들리

   (2) 18세기 : 조나단 에드워즈, 휫필드, 웨슬리형제, 로우랜즈, 해리스


제2장 대체할 수 없는 말씀 증거


1) 구원에 관한 성경의 교훈은 모두 말씀증거를 통해 이뤄진다.

2) 이 모든 것은 교회와 목사의 고유한 임무이다.

3) 사회의 부조리, 영적 문제들을 교회만이 해결할 수 있는데, 그 주도적 역할을 목사가 한다.

4) 교회가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 말씀사역이라는 1차적 사역에 전념할 때 나머지는 따라오게 되는 것이다.

5) 개인의 문제에 있어서도 상담보다 설교가 더 큰 효과를 보일 때가 많다.

6) 현대사회는 지적인 사회여서 혼자서도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혼자서는 자기 판단에 의해 취사선택하므로 변화가 잘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함께 모여 말씀을 들을 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제3장 설교내용과 전달행위


1) 설교로 전달하는 것에 대한 반론

    (1) 시대가 변하지 않았는가?

    (2) 독서나 텔레비전, 라디오로 그 모든 일이 이뤄질 수는 없는가?

    (3) 그룹토의에 의해 더 훌륭하게 이뤄질 수 없는가?

        but> 하나님은 토론의 주제가 될 수 없다.

             우리 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토론거리가 될 수 있는가?

             영적인 요소에 무지한 자연인에게는 영적 토론이 불가능하다.

2) 그래서 설교를 대체하는 현대의 모든 방법은 잘못임을 강조한다.

3) 그러나 사람들이 듣지 않는데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but> 그러나 이 문제는 하나님 자신의 방법이기 때문에 우린 순종만 할 뿐이다.

4) 참된 설교란 사람들이 몰려와 그것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잘못된 설교를 가지고 설교를 보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5) 설교는 강단에서 서 의사를 전달하는 연설이 아니라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6) 설교는 결심할 수 있는 지점까지 우리를 끌고 가, 이전 생활이 잘못되어 있다고 느껴 회복을 고백하게 하는 것이다.

7) 설교란 전인을 다루는 것이고 듣는 이가 감복하게 되어 이 설교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다루시고 계시며 자기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8) 구분지어야 할 설교의 두가지 요소

    (1) 설교내용 : 메시지(구원, 교훈)+메시지에 주어진 형태

    (2) 설교행위 : 설교행위만 좋아도 좋은 설교자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제4장 설교의 형식


1) 전도 설교 : 오늘날 가장 비신학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2) 그렇다고 설교가 신학이나 어떤 신학의 국면을 강의하는 것만은 아니다.

3) 우리는 복음을 설교해야지 복음에 관하여 설교해서는 안 된다. 설교에서 설교자는 전도하는 식으로 설교하거나 사람들의 제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문제를 다루는 사람이다.

4) 설교가 도덕적 윤리적 원리를 적용시켜주기도 하지만 이것이 주된 목적은 아닌 것이다.

5) 설교란 수필이 아니다. 수필은 반복하지 않지만 설교는 반복해서 요점을 강화한다. 수필은 특정 사상 생각 특정 개념만을 취급하지만 설교는 그렇지 않다.

6) 설교란 강의가 아니다. 강의는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진술하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에서 나타나는 호소는 강의에는 없는 것이다.

7) 설교를 특징짓는 형식

    (1) 설교준비를 시작할 때 본문 구절해석에서 부터 출발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강해부터 시작해야 된다.

    (2) 본문에서 윈리를 뽑아낸다.

    (3) 명제(대지, 소제목)잘 배열해야 한다.

    (4) 메시지를 적용한다.

8) 설교는 본문의 메시지를 파헤쳐야 한다. 그리고 예술처럼 일정형식을 갖추고 완전체를 갖춰야 한다

9) 이 모든 일은 설교를 듣는 청중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설교는 땀과 노동을 필요로 한다.


제5장 설교 행위


1) 참된 설교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점들

   (1) 설교자의 전인적 품격

   (2) 자연스러움의 요소. 원고에 너무 매이지 말아야 한다.

   (3) 진지함의 요소. 가볍거나 피상적인 대수롭지 않은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

   (4) 뜨거움의 요소. 감동이 없는 자는 감동을 줄 수 없다.

   (5) 긴박감의 요소.  여기에서 수필과 설교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다.

   (6) 정념의 요소. 설교를 듣는 사람에 대한 연민의 정의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제6장 설교자


1) 전제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설교일에 종사하도록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감리교회, 형제교회의 평신도 설교의 문제는 소명의 부제이다.

    -평신도 설교자들이 약함과 두려움과 떨림으로 설교하는 것에 대해 알고 있는가?

    -평신도가 신학의 변화 속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가?

    -평신도가 비상한 영성을 흔들림 없이 유지할 수 있는가?

2) 재능은 그러한 자질을 강조하고 나서만 오는 것입니다.

3) 설교자는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말의 재능을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4) 설교자는 일반적인 지식과 경험을 갖춘 자라야 한다. 이것 바탕으로 전문 신학교육을 받을 수 있다

    -성경신학, 교회사, 설교학


제7장 회중


1) 보통사람층 : 분위기 조성 후 간단한 복음의 말씀으로 끝내라

2) 성경적 전문용어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층 : 그들의 언어로 풀어서 설교해야 한다

3) 지식층 :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고 설교해야 한다.

4) 이시대의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일시적인 것에 너무 관심을 두어서는 안된다.


제8장 메시지의 성격


1) 결코 회중이 강단이나 메시지를 좌우하거나 지시해서는 안 된다.

2) 그러나 청중의 평가에도 귀 기울여야 합니다.

3) 모든 청중이 그리스도인이란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교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을 복음의 능력 아래로 인도해야 할 필요가 있다.

4) 설교자는 영적권위를 가지고 설교할 수 있어야 한다.


제9장 설교자의 준비


1)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설교자에게 휴일은 없다. 언제나 자신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2) 항상 기도해야 한다. 기도한후 설교하라. 기도는 아침에만 하는 것이 아니다.

3) 매일 정규적으로 성경을 읽어야 한다. 읽되 조직적으로 읽어라 통독해라. 연구하라

4) 경건한 독서를 하라. 설교집도 읽어라. 독서를 위한 시간을 마련해 두어야 한다. 균형있는 독서를 하라. 독서는 설교의 아이디어를 발견하기 위함이 아님을 명심하라.

5) 음악도 설교자에게는 도움이 된다. 긴장을 풀고 부드럽게 해 준다.


제10장 설교 준비


1) 본문에 입각한 설교를 할것인지, 시리즈로 할 것인지 미리 생각해 둔다.

2) 한편의 설교는 사실상 주어지는 것이다.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3) 성경을 연구하되 조직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4) 연속설교를 하더라도 한 설교는 항상 완성체로 끝나야 한다.

5) 본문의 문맥에 맞게 설교준비 해야 한다.`


제11장 설교의 조직


1) 서론, 본론, 결론으로 나누는 방법

2) 대지(소제목)으로 나누는 방법

    (1) 소제목들은 본문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와야 한다.

    (2) 대지가 꼭 세개일 필요는 없다.

    (3) 설교의 틀을 두고 너무 고민하지 말라. 그러나 틀이 없어 상대를 혼란스럽게 하지는 말라

    (4) 꼭 대지를 한꺼번에 이야기 할 필요는 없다.

    (5) 작성한 설교내용을 다 쓸 필요는 없다.

    (6) 즉흥적인 설교도 위험하지만 너무 문학적으로 갖추어 쓰는 데에 의존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7) 책을 인용하면서 시작하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진리를 선언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8) 너무 세밀하고 논리적으로 전개하려 하지 말기 바란다.

3) 설교를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지나친 준비는 위험하다. 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접근하려 들지 말고 실제적으로 사람을 기억하며 준비해야 한다.


제12장 예화, 웅변, 유머


1) 즉흥설교보다 설교를 써서 하는 사람이 더 위험할 경우가 많다.

2) 쓰는 사람 중 대지만 써 놓았다가 낭패를 보기 때문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주요대지와 세목을 자세히 정리해 두어야 한다.

3) 설교는 회중과 주고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그냥 낭독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4) 남이 사용한 예화를 계속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설교보다 많은 예화를 하는 것도 옳지 않다. 또한 사실에 근거한 예화인지 확인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5) 상상력을 사용하는 것은 유쾌할 수는 있으나 조심해야 한다. 설교자는 언제나 밝혀져야 하는 것보다 밝혀주는 상상력이나 일화 자체에 기쁨을 가질 때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6) 설교자는 웅변적 재능이 있어야 합니다.

7) 유머 설교에서 유머를 사용할 수도 있다.

8) 설교의 길이는 기계적이거나 고정적이지 않다. 설교자 자신 청중등을 고려하면 된다.


제13장 금기사항


1) 설교주제를 미리 알려주는 것은 거짓된 주지주의를 북돋아 줄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제목이 해당 문맥을 고정시킬 수 있다는 점입니다.

2) 라디오 텔레비전 설교는 설교의 신뢰도를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3) 설교자는 직업주의를 피해야 한다. 그런 사람은 너무나도 형식적이다.

4) 지식의 과시를 피해야 한다. 폭넓은 독서와 교양의 인상을 주는 것은 좋지 않다.

5) 설교를 준비한 것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6) 설교자는 특이하려고 하는 무서운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7) 설교시 너무 논증적이어서도 안됩니다.

8) 풍자할 때 조심해야 한다.

9) 전달방법에 주의해야 한다.

10) 목사다운 목소리를 내려고 하지 마라

11) 수다스러움을 피하라


제14장 결심의 요청


1) 그리스도인이 아닌 성가대원을 쓰는 것은 옳지 않다.

2) 성가대를 없애는 것은 옳지 않으나 분위기 유도용으로 써서는 안된다

3) 네틀턴은 헌신의 요청을 하지 않고도 부흥을 일으켰으나 피니는 헌신의 요청을 했다.

4) 결심의 요청이 나쁜 이유

   (1) 의지에 직접적 압박을 하는 것은 나쁘다.

   (2) 의지에 대한 너무 과다한 압력이나 너무 직접적인 강압이 위험한 것이다.

   (3) 말씀증거나 결신의 요청이 우리의 사고에서 분리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4) 이 방법은 죄인들이 처음부터 결신, 자기회심의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5) 그것은 전도자가 성령과 그의 역사하심을 어떻게 해서 교묘히 조장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암시한다.

   (6)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에 응함으로 은혜를 받을 것이란 인상을 가지고 있다.

   (7) 이렇게 함으로 여러분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이후의 행위가 어느 정도 그들을 구원한다고 생각하게끔 한다.

   (8) 중생의 교리 전반적인 면에서 문제를 일으킨다.

   (9) 어떤 죄인도 그리스도를 위한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제15장 함정과 낭만


1) 함정

  (1) 스펄전은 반대하지만 한번 한 설교를 다른 장소에서 다시 하는 것도 괜찮다.

  (2) 설교내용은 전해진 결과로 더 발전하게 된다.

  (3) 남의 설교를 해서는 안 된다.

 

2) 낭만

  (1) 설교는 지상최대의 사역이다.

  (2) 설교자의 건강상태에 따라 그 효과는 배가될 수 있다.

  (3) 모두 설교하지 못하도록 저지 받을 때도 있다.

  (4) 설교를 듣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것

  (5) 꼭 자기에게 한 설교같다는 이야기를 들을때


제16장 영력있는 증거


1) 설교자는 성령께 쓰임을 받아 성령의 능력으로 일한다.

 

 

 

 

<서평 : "선배목사님의 불호령 같은 이야기">

그 동안 책장 한 켠을 차지하고 있던, 책을 드디어 읽었다.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읽어야 한다기에 진작에 사 두었지만, 쉽사리 손이 가지 않았고 먼지만 쌓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어제 오늘에 걸쳐서 단숨에 다 읽었다. 이미, 수업 중에 [설교의 영광]을 읽고 있기 때문에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고 쉽게 쓰여 있는 책이라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1. 설교자에 대한 자존감


이 책을 읽으면서 전체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점은, 설교자에 대한 넘치는 자존감이었다. 2장 ‘대체할 수 없는 말씀의 증거’에서 보면, 구원과 교훈은 오직 말씀을 통해서만 주어진다고 말하고 있고, 6장 ‘설교자’에서도 소명 받지 못하고 쉽게 변할 가능성이 있는 평신도가 설교하는 것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8장 ‘메시지의 성격’에서도 설교자의 영적 권위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저자가 설교자의 자존감을 높인다고 해서 무작정 자만한 것은 아니었다. 책을 시작하는 1장 ‘설교의 우위성’에서는 설교자들이 ‘설교꾼’이 되어가고 ‘가식적’으로 변하며, ‘연설’처럼 행하고 있음에 대해 강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중심된 흐름은 ‘설교자는 위대하다.’ ‘설교자는 존귀하다.’라고 생각된다. 나도 로이드존스 목사의 생각에 동의한다. 교회의 핵심은 설교자이고 설교이다. 교회 부흥의 이유가 각각 다르겠지만, 공통적인 점은 부흥하는 교회에서는 능력 있는 설교가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설교자에 대한 로이드존스의 자존감이 혹 교만으로 비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교회의 설교자가 너무 겸손하기만 하고, 진취적인 자존감을 소유하지 못하였다면, 그것도 교회 부흥과 회복에 별 도움이 되지 안을거라고 생각된다. 이런 의미에서 목사는 자신의 문제점을 인식하는 가운데서, 자신을 항상 다듬어 가는 가운데서 설교자의 자존감을 유지해야 함을 이 책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


2. 설교에 대한 관점의 변화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그간 어렴풋이 알고 있었거나, 잘못 알고 있었던 것들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된 계기를 갖게 되었다. 먼저 2장 ‘대체할 수 없는 말씀증거’에서 교회는 다른 문제에 전념하기보다, 1차적으로 말씀증거에 힘쓰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하는 말 속에서 그 동안 가졌던 생각을 정리하고 확고히 할 수 있었다. 나도 그 동안 예배와 설교의 회복이 교회 회복의 첫걸음이자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이, 교회의 문제 해결을 위해 예배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프로그램들을 도입하여 해결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런 와중에 ‘나의 생각이 과연 옳은가?’ 반신반의하고 있었는데, 이번 [목사와 설교] 책의 내용을 통해 내 생각을 확고히 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예배이다. 예배시간에 선포되는 말씀은 성령의 역사를 동반하기 때문에 더 강력하다. 이것을 알아서인지 ‘명성교회’는 어떤 작은 모임을 하더라도 설교를 한다고 한다. 나도 설교를 연설, 웅변과 비슷한 정도로, 마음에 감동을 주는 정도로만 은연중에 생각했던 것 같은데, 성령이 역사하는 강력한 도구임을 다시 한번 명심해야겠다.

다음으로 13장 ‘금기사항’을 보면서 설교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되었다. 먼저 ‘설교주제공시’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해 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 그것을 통해 설교를 미리 예측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를 방해하고, 성도들이 예배를 취사선택 할  가능성이 있다는 저자의 지적을 통해 이것의 문제점을 공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요즘 보편화된 ‘라디오, 텔레비전 설교의 문제점 지적’에도 깊은 공감을 느꼈다. 사실 오늘날 라디오 텔레비전 설교는 더 많은 사람에게 말씀의 기회를 준다기보다 목사가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는 장으로 활용하거나, 성도들이 여러 목사들의 설교를 평가하는 정도로만 사용되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결국 저자의 말처럼 방송설교가 별 유익을 끼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방송설교의 문제점을 명확히 정리할 수 있었다.


3. 저자의 보수성


이 책의 많은 부분에 공감하면서도, 1971년도에 쓰여진 책이라서 그런지 보수적인 색채를 부인 할 수가 없었다. 먼저 간증, 상담의 영향력이 매우 강해진 오늘날에 설교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말하는 로이드 존스의 말은 너무 보수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8장 ‘메시지의 성격’에서 청중을 고려해야 함을 강조하면서도, 그냥 낭독하는 설교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여전히 설교자의 영적 권위를 강조하는 것으로 결론짓고 있는 것도 보수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목소리를 바꿔 설교하는 것이라든지, 설교자는 수다스러우면 안된다든지, 뛰어서 설교단에 오르면 안된다든지 하는 것들도 보수적일 저자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는 점이었다.

무엇보다도 저자의 보수성이 극에 달한 부분은 ‘성가대 문제’이다. 오늘날 성가대를 두고 누가 뭐라 하는가? 그런데 저자는 성가대를 두는 것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가대를 감성을 자극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오늘날처럼 교회 내에 감성을 자극하는 요소가 많고, 오히려 감성을 자극해야만 목회에 성공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떠도는데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보수적인 발상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나는 이런 로이드존스 목사의 보수성에 동감하는 바이다. 그리고 이 보수성을 이어 받아 목회 해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4. 결심의 요청


로이드존스는 14장에서 설교 후 영접할 것을 요청하는 행위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의지에 직접적 압박을 하는 것은 나쁘기 때문이고, 의지에 대한 너무 과다한 압력이나 너무 직접적인 강압이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씀증거나 결심의 요청이 우리의 사고에서 분리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고, 이 방법은 죄인들이 처음부터 결신, 자기회심의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전도자가 성령과 그의 역사하심을 어떻게 해서 교묘히 조장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암시하는 행위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에 응함으로 은혜를 받을 것이란 인상을 가게 되는 문제가 있으며, 이렇게 함으로 여러분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이후의 행위가 어느 정도 그들을 구원한다고 생각하게끔 한다. 마지막으로 중생의 교리 전반적인 면에서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어떤 죄인도 그리스도를 위한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제임스 패커나 존 스토트도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오늘날 전도 방법이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는 차원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신앙을 선택하는 쪽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사영리’를 대표로 한 대부분의 전도지도 이처럼 영접을 권유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많은 목사들은 말하기를 현대 기독교가 신자를 만드는데는 성공했지만 성도를 만드는데는 실패했다는 말을 하는 것도 이와 관련된 이야기일 것이다.

문제는 이런 ‘부흥운동’ 관련 전도 양식이, ‘오순절 교회’의 기도운동과 결합하여 오늘날 한국교회에 만연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람을 교회에 많이 불러모으는 것이 관건이고 불러모은 그들에게 기도를 통해 복을 안겨준다는 사탕발림의 말로 교회가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장로교도, 감리교도, 성결교도, 침례교도 아닌, 전체가 오순절화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러한 전도와 설교의 폐단을 로이드 존스 목사가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래서 나는, 자신의 의지를 사용해 구원을 선택하는 것처럼 가르치는 이런 나쁜 풍토에서 벗어나, 죄를 분명하게 인식시키고 깨닫게 하고, 통회하는 가운데서 주님의 긍휼을 구하게 하는 전도, 설교법을 행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늘 이 책을 통해,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이 책을 읽어가면서 나는, 나이 많은 노목사님이 많은 젊은 목사들을 앉혀 놓고 때로는 호통을 치시면서 때로는 온화한 음성으로 이야기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었다. 그것은 아마도 책표지에 나온 로이드존스 목사의 초상화가 머리 속에 각인되어 책의 내용과 결합되어 내 마음속에서 작용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목사의 새로운 모습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리고, 나도 로이드존스처럼 은퇴할 때 까지 부끄럽지 않고 타락하지 않는 목사가 되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도 나이가 많이 들면 로이드존스 처럼 젊은 목사들에게 목사의 길이란 이런 것이라고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