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너무나도 좋은 책을 대한 것 같아 마음이 흐뭇하다. 처음에는 ‘700페이지나 되는 책을 언제 다 읽나?’ ‘리포트 쓸 만큼만 부분 부분 읽고 써야 겠다.’라는 생각을 한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하지만, 책을 펴자 마자, 청교도의 출발이 ‘발도파’라는 것이라든지, 청교도의 출발 배경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이 책의 매력에 조금씩 빠져 들게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을 요약해서 두고두고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2주간에 걸쳐 한시간에 30페이지 정도 밖에 못 읽었지만, 지루해 하지 않고 꾸준히 읽고 또 정리했다. 그래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럼, 지금부터 과제의 기준과 같이, [경건], [목회], [신학]에서 한가지씩 인상깊었던 부분을 골라,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2. 본론
1) [경건]
조나단 에드워즈의 경건을 알 수 있는 부분은 뭐니뭐니 해도, 예일대학 시절 적었던 [70가지 결심문]과 [일기들]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리라 생각하고, 또 이 부분을 가지고 글을 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70가지 결심문]을 통해 받은 첫번째 인상은, “이 결의를 잊지 않기 위해 매주 한번씩 읽기로 다짐했다.”는 부분이다. 보통 사람들은, 뭔가에 충격을 받게 되면 결심을 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런 결심을 한다고 해서 그 결심을 매번 다시 돌아본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들도, 수련회나 부흥회를 통해 은혜를 받게 되면, 다짐을 하지만, 결국 3개월 내지, 길면 6개월 밖에 가지 못하지 않는가? 그런데,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러지 않았던 것 같다. 결심문과 아울러 써 나갔던 일기를 보면, 1722년 부터, 1725년 까지 쓴 것으로 봐서, 결심문이 최소 3년은 갔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후, 결혼과 노샘프턴 교회 사역에도 [70가지 결심문] 지켜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에드워즈의 생애를 미루어 보아서는 죽을 때까지 실천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내용을 읽으면 나도 내 인생에 지켜야 할 몇가지의 결심내용을 써 봐야겠다는 도전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에드워즈처럼 꾸준히 지켜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70가지 결심문 중에서 특별히 인상 깊었던 부분들을 몇 가지 소개해 보도록 하겠다. 첫번째로, [14번째 결심문]인 “보복에 대한 경계심”이다. 에드워즈가 “은밀한 복수를 기대하고 약간의 만족을 느꼈다”라는 말에 얼마나 동감이 갔는지 모른다. 나 또한 이유 없이 불이익을 당할 때에는 참지 못하고, 속으로 그 사람이 불행하게 되는 꼴을 상상하면서 통쾌해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내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이 세상의 청지기인 내가 주인처럼 행세하려 했다는 것을 생각하니 하나님께 너무 죄송스런 마음이 들기도 했다. 앞으로 목회를 하면서도 억울한 일을 수도 없이 당할 것인데, 이번 조나단 에드워즈의 책을 통해서, 그런 복수심을 다스릴 수 있는 원천을 얻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번째로 인상 깊었던 부분은, “시간을 아끼고 선용하겠다는 인식”이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누구나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의 적극성에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음식까지 줄여서 식후에 소화시켜야 하는 부담감을 없애는 일 까지 했다는 것을 보면서 그가 얼마나 철저한 “Puritan”이었는지 짐작하고 남았다. 그리고, 1723년 9월 23일 일기에서 인생이 짧아 공부를 다시 할 여가가 없기 때문에, 꼭 해야 할 공부만 하겠다는 그의 결심이 내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얼마나 필요한 말인가?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일에 쫓겨서 제대로 된 결과를 맺지 못하는 젊은이들을 생각할 때, 나 자신을 생각할 때, 에드워즈의 이런 말은 깊이 새기고 또 새겨야 할 말이란 생각이 든다.
세번째로 인상 깊었던 부분은, 영혼에 대한 관심이다. [25번째 결심문]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의심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철저히 맞서겠다”는 다짐이라든지, [48번째 결심문]에서 “엄밀함과 부지런함으로 자기 속에 그리스도가 주는 분깃이 있는지 확인하겠다”는 말들을 통해서, 에드워즈가 얼마나 구원에 대해 철저하게 검증하고 또 검증한 사람인가를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오늘날을 돌아보면 구원에 대해서 얼마나 엉성한 채 다른 일로 넘어가고 있는지 모른다. 모두들 교회만 나오면, 세례만 받으면 구원얻었는 줄 알고, 그 구원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지 않고 여러 가지 일을 떠넘기고, 또 성도들도 구원의 기쁨보다는 일에 대한 성취 욕에 바삐 살아가는 시대가 지금의 시대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에드워즈는 빌립보서에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사람”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그의 저서 [뉴잉글랜드에 현재 종교 부흥에 대한 소고]의 “3부”에서 “사람들이 종교집회에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한다”라는 말에 에드워즈가 “그들은 구원이라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과업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난 충격을 받았다. 그간 우리들도 교회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보면, ‘좀 쉬엄쉬엄 하지’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자신의 구원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구원을 베푸신 주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모습이요, 가장 지속적으로 행해야 할 일임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이런 노력의 결과로 얻어진 에드워즈의 중생체험은 신앙인으로서 꿈꾸는 절정을 경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18살 때, 디모데 전서 1:17절의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존귀와 영광을 계속 묵상하기 위해 노력한 모습이나, 그 감각을 이어나가 뉴욕의 설교자로 봉사할 때에 활용한 것, 그리고 그 감각의 절정으로 [종교적 정서]라는 책을 쓴 것을 보면서, “야~ 나도 저런 성령충만을 받았으면 좋겠고, 그 성령충만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
에드워즈의 놀라운 신학적 업적은 아마도 이러한 경건의 훈련과 열매에서 출발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처럼, 경건의 모양만이 아닌, 경건의 능력을 갖춘 에드워즈의 경건이야 말로 오늘날 목회자들이 반드시 사모하고 이룩해야 할 표본이 아닌가 생각된다.
2) [목회]
조용기 목사님의 [4차원의 영성]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을 읽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특별히 부름 받은 종은 뭔가가 다르긴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 물론, 지금의 조용기 목사님의 모습에는 아쉬운 점이 많지만, 신학교를 졸업하시고, 개척과 동시에 폭발적인 부흥을 경험하셨다는 것이 너무나도 놀랍고 신기할 따름이었다. 오늘 책의 주인공인 에드워즈의 목회사역도, 이처럼 훌륭한 설교자의 자질이 처음부터 나타났다는 것에 있어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의 첫 설교지였던 [뉴욕장로교회]에서 8개월간 설교하면서, 교회의 분열이 해결되었다는 것을 읽고서는 그의 인격과 실력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 분열된 교회, 문제 있는 교회에서 목회하는 것이 개척교회 하는 것 보다 더 힘들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그런 곳에서는 설교만 잘해서도 안되고, 친화력만 있어서도 안 된다. 친화력을 가지고 한사람 한사람 찾아다니면서 친해진 후, 설교말씀을 통해 은혜를 끼쳐 깊은 화해와 회복을 이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뉴욕장로교회에서 보여준 에드워즈의 모습은 아마도 이런 모습이 동시에 들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에드워즈의 이런 목회 능력은, 오늘날처럼 깨어진 교회가 많은 시대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리고, 코네티컷 강을 따라 형성된 마을에 불어닥친 부흥을 주도하는 에드워즈의 목회 모습에도 깊은 인상을 받았다. 특별히, 당시의 시대를 읽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설교를 통해 바른 길로 인도하는 선한 목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먼저, 그 당시 조금씩 일어났던 ‘알미니안주의’에 성도들이 현혹되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했던 점이라든지, 지성적 믿음이 난무하던 시대에 “종교, 도덕적 의무” 등과 같은 [은혜의 수단]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점검하라는 부분, 그리고, 설교 “죄인들의 정죄에 나타난 하나님의 정의”에서 심판과 지옥을 가감 없이 외쳐 성도들로 하여금 죄에 대한 심각성을 다시금 되새기게 한 것이 그에 해당하는 예가 아닌가 생각된다.
교회에서 성도들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설교로 은혜를 끼치는 목사, 시대적 흐름을 읽어 성도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목사! 이 얼마나 이상적인 목사인가? 이런 목사의 삶을 담기를 소원하고 이번에 이런 모델을 발견하게 되어서 너무 기쁘게 생각한다.
3) [신학]
1740년 전후로 있었던 미국 동부의 [1차 대각성]의 주인공은 당연히 “조지 윗필드”일 것이다. 웨슬리가 실패한 조지아에서 시작하여, 필라델피아, 뉴욕까지 진출한 윗필드, 1740년, 뉴잉글랜드지역에 진출하여 73일간 800마일을 가면서 130회 설교를 했다. 그러면서 엄청난 부흥을 주도하였고, 상점은 물론이고, 법원까지도 쉴 정도의 부흥을 이끌었다. 그는 에드워즈가 사역하고 있었던 노샘프턴에도 초청받아 방문하여 부흥을 이끌어 주었다. 하지만, 그는 “제임스 데이번 포트”의 극단적 부흥운동으로 형성된 반부흥주의에 밀려 점점 힘을 잃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섯번이나 더 전도여행을 했으나, 1차 대각성 같은 부흥은 일어나지 않았고 1770년 뉴베리포트의 장로교회 설교단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에 반해, 에드워즈는 분명 1차 대각성 중에 드러난 영웅은 아닐 것이다. 그는 어쩌면 1차 대각성에 참여한 한 사람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윗필드가 버리고 간 대각성의 뒷수습을 감당했던 사람이었다. 자칫 광신의 시대로 몰릴 뻔한 대각성을 극히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일로 정리한 신학적인 면에 있어서 1차 대각성의 영웅이 아닌가 생각된다. 반부흥주의자들의 집요한 공격에 “성경의 역사와 구별된 표지들” [뉴잉글랜드의 현재 종교 부흥에 대한 소고], [종교적 정서] 등의 설교와 저서들을 통해, 그들을 입다물게 만들고 부흥주의자들의 어머니 역할을 자처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은 그렇게 좋지 만은 않았다. “제임스 데이먼 포트”가 내뱉은 말로 인해 교회의 담임목사들은 화가 나 있었고, 대부분이 반부흥주의에 가담한 상태였다. 심지어는 예일대 당국, 하버드대 당국, 코네티컷 햄프셔 군 까지 반부흥주의에 가담한 상태였다. 기득권자들의 안전지향적인 모습을 여실히 들어내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소수파로 전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소신을 끝까지 지켰다는 것이 에드워즈의 위대함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려말 문인 중 영웅을 들라면, 정도전과 정몽주를 들 수 있다. 이 두사람의 공통점은 고려와 고려백성들의 장래를 무척이나 걱정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도전은 이성계와 이방원의 권유에 생각이 바뀌어서 나라를 새로 세워 백성을 구하자는 입장을 가지게 되었고, 정몽주는 고려황실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가자는 기존 입장을 지키게 된다. 결국 정몽주는 고려의 멸망과 함께 이방원의 철퇴에 죽게 된다. 하지만, 정도전은 조선의 법체계를 만들고, 조선초기의 공신으로 많은 일을 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 뇌리에 충신으로 기억되는 사람은 정도전이 아니라, 정몽주이다. 왜냐하면 정몽주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끝까지 지킬 줄 아는 심지가 굳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조정도, 충을 강조하기 위해, 정도전이 아닌 정몽주를 위인으로 추앙하는 것을 보면, 자기의 뜻을 위태한 상황에서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얼마나 큰 인상을 주고, 기억에 남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 정도전이 오늘 책의 주인공 에드워즈와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에드워즈는 여러 설교와 책들을 통해, 당시 부흥주의자들에게 나타난 여러가지 불미스러운 요소들을 공격하는 반부흥주의자들에게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대각성의 참 의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가지 아쉬운 점은 성찬에 대한 그의 태도 변화이다. 대각성 시기에 교회 내에서 회심자가 나오고, 성도들에게 구원의 확신에 대한 인식이 희미해져 가는 것을 담임목사로서 볼 때, 가만히 있는 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겸허한 질의]라는 책을 통해 오간 신학적인 논쟁과 반론은 고집스럽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마치, 인정받고, 사랑 받는 권력자가, 겸손을 잊어버리고 무조건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는 모습이랄까? 그리고, 그 당시, 사례문제로, 권징문제로, 친인척과의 문제로 관계가 악화되어 있는 상태에서 이런 성찬논쟁을 불러 일으켜 스스로 무덤을 팔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점이 아쉽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물론 교회 성도들의 회원권을 함부로 부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교회는 순수성을 유지해야 하고, 그 순수성은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목사로서 지켜야 할 것임에는 분명하다. 그런데, 교회에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이 화목이다. 아무리 내 생각이 맞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이 이에 동의하지 않고, 이 일을 통해 교회에 분란이 일어난다면, 그 일은 내고해 보아야 할 일인 것이다. 그런데, 에드워즈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 보다 자신의 의견이 더 확고히 옳다는 생각 하에서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밀고 나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성찬에 대한 기준들은 교회가 담임목사가 정해서 규칙화하는 것 보다, 개인에게 맞기는 것이 옳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에드워즈가 70가지 결심문 중, 14번째 “복수에 대한 결의”를 한 상태이지 않는가? 모든 일의 재판장은 하나님이신데, 그 권세를 대신 가져와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은 옳지 못한 처사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 점을 제외하고서, 대각성의 신학자로, 실천이 결합된 신학자로 우뚝선 에드워즈의 신학은 우리가 두고, 두고 본받고 읽어보아야 할 부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3. 결론
난 신학대학 출신이 아니다. 그래서, 신학에 대해 신학 역사에 대해, 성경에 대해, 성경 원어에 대해 모르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래서 불편하고 힘든 점도 많지만, 좋은 점도 많다. 이번 경우처럼,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 청교도에 대해 전혀 몰랐기 때문에 난 이 책에 빠져들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만약, 에드워즈에 대해 어줍잖게 알고 있었다면 이 책을 한자도 빠지지 않고 읽어 나갔겠는가?
이 책을 다 읽고 정리하면서, 세가지 다짐을 하게 되었다. 먼저 한가지는 틈틈히 내가 정리한, 이 내용을 읽어봐야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위대한 선배 목사님의 일생을 그대로, 창조적으로 본받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든다. 두번째 다짐은, 나도 이런 실천적인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신학수업 리포트를 하면서 이렇게 까지 생각하기는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첫째로는 책이 잘 쓰여졌기 때문이고, 둘째로,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사람이 너무나도 실천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세번째 다짐은, 앞으로 신학수업에 관련된 레포트를 할 때에는 정말 꼼꼼히 책 읽고 잘 정리하고, 정성껏 레포트를 써야겠다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이렇게 훌륭하고 중요한 내용들을 그간 얼마나 가볍게 대해 왔던가? 앞으로는 나에게 주어진 책과 과제를 성실히 이수해서 신학자로서의 소양을 닦는 일에 게으르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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