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소논문] 개혁주의신학과 카톨릭신학 비교 연구

주전담백 主前淡白 2010. 7. 11. 12:22

 

 

 

1. 머리말

 

통계청에서 발표한 “20년간 한국의 종교 인구변화”를 살펴보면 불교는 85년에는 8,059,624명, 95년에는 10,321,012명, 05년에는 10,726,463명으로 집계되었고, 개신교는 85년에는 6,489,282명, 95년에는 8,760,336명, 05년에는 8,616,438명으로 집계되었으며, 카톨릭은 85년에는 1,865,397명, 95년에는 2,950,730명, 05년에는 5,146,147명으로 집계 되었다. 불교는 소폭 상승했고, 개신교는 소폭 하락했으나, 카톨릭은 20년 전과 비교했을 때 3배 성장한 것을 볼 수 있다. 카톨릭의 성장이유를 두고, 개신교회 성도들의 이탈로 이뤄진 것이라며 폄하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그러나 요즘 한국교회는 카톨릭 영성훈련과 공동체 프로그램 도입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한국교회는 ‘관상기도’와 ‘레노바레’, ‘뜨레스 띠아스’를 도입해, 통성기도, 신유, 축복 등으로 순복음화된 교회를 차분히 정화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인간의 전적 부패로 인한 성자 예수님을 통한 구원만을 말하는 개신교와는 달리, 죄인이 아닌 인간이 하나님과의 합력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는 카톨릭 신학이 바탕에 깔린 프로그램들을 과연 활용해도 좋은가 하는 점이다. 아무리 카톨릭적인 색체와 신학적 문제점들을 수정한다고 해도, 알미니안주의와 칼빈주의가 융합될 수 없듯이 카톨릭의 프로그램을 통해 개신교회는 은연 중에 신인합일을 통한 신비주의적인 카톨릭의 신학에 물들어 가고, 성자 예수님 없는 직통계시를 선호하게 되는 결과가 주어지지 않을까 염려된다. 그래서 오늘의 소고(小考)를 준비해 보았다.

‘카톨릭이나 개신교회나 같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같은 뿌리 아닌가?’라고 대충 생각하고 있는 성도들을 위해서 카톨릭과 개신교회의 근본적인 신학적 차이점을 알아보고자 한다. 특별히 한국교회 개혁주의 조직신학의 근간을 형성한 죽산 박형룡 박사의 저작 전집 1-5권을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카톨릭과 개신교회의 차이점을 확실히 인식하고, 바른 조직신학적 관점 하에서 카톨릭을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2. 본 문

 

2-1. 1권 [신학서론]에 나타난 개혁주의 개신교와 카톨릭 신학 비교 연구

 

2-1-1. 개혁주의 개신교회가 말하는 교의신학의 원천 “성경”

 

신학서론을 신학을 하기 위한 전단계라고 생각하는데, 신학자체라고 할 수 있다. 비유로 말한다면, 집 안의 마루 쯤 되는 것이다. 박형룡 박사는 교의학의 유일한 원천, 원리를 성경으로 보았다. 원천이란 기원을 의미한다. 그리고 신학의 원리에는 존재의 원리와 인식의 원리가 있다. 존재의 원리란 하나님의 지식은 스스로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식의 원리란 그 하나님의 지식을 외적으로는 성경을 통해 인식할 수 있고, 내적인식으로는 믿음, 성령을 통해 인식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첫 번째 길은 성경인 것이다.

죄로 타락한 인간에게 일반계시는 참된지식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보다 확실하고 직접적 방법으로 성경을 주신 것이다. 즉 일반계시는 불충분하나, 성경은 충분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을 일반적 특별적 계시로 가르치시는 것이다. 이런 박형룡 박사의 주장은 워필드, 툴레띤, 카이퍼, 바빙크, 톤월, 지란디오와 맥을 같이 한다.

 

2-1-2. 카톨릭이 말하는 교의신학의 원천 “교회”

 

그러나 카톨릭은 교의신학의 원천을 성경보다 교회의 결정에 둔다. 즉 카톨릭의 교리에 의하면 교회는 기독교 신앙과 실행의 모든 사건들에서 절대적으로 무오하며 신앙의 준칙의 신정보관자와 해석자이다. 교회의 직무는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들을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은 아니나 그것의 영감은 사도들을 통하여 전수된 본래적 계시를 전파하며 해석함에 그것을 무오하게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무엇이 성경인지, 무엇이 참된 유전인지 무엇이 성경과 유전의 참뜻인지를 권위적으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카톨릭에서는 교회의 교훈이 신학의 원천과 규범으로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개혁주의 개신교회가 성경을 교의신학의 원천이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으로 삼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카톨릭은 교회의 교훈과 성경을 같은 지위로 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되게 된 배경에는 카톨릭 교리에는 카톨릭교회에 성경 승인권, 해석권이 있다고 되어있기 때문이다. 성경 승인권이란 교회가 성경을 승인하지 않으면 성경은 성경이 아니다는 뜻이고, 성경 해석권이란 교회가 성경을 해석해야 성경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개혁주의 개신교회는, 전통은 성경에 의해 규범된 규범일 뿐이라는 점에 인식을 같이 한다. 즉 성경이 규범하는 규범이라는 것이다.(rule ruling) 칼빈은 성경은 안경(쓰지 않으면 안 보인다) 실(성경을 잡아야 빠져나온다) 학교(성경에서만 배워야 한다)이라고 비유했다. 이 비유처럼 개혁주의 개신교회는 성경의 권위를 어떤 전통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한다.

 

2-1-3. 교의신학의 원천에 대한 인식차이와 ‘뜨레스 띠아스’

 

우리는 위의 글을 통해 개혁주의 개신교회의 신학원천과 카톨릭의 신학원천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다. 즉, 개신교는 신학의 원천을 성경에 둠에 반해, 카톨릭은 교회의 결정과 전통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는 천주교 공동체훈련 프로그램인 ‘뜨레스 띠아스’에서도 여실히 들어난다. ‘뜨레스 띠아스’란 스페인어로 ‘3일’이라는 뜻으로 카톨릭 ‘꾸르실료운동’에서 파생되었는데 현재 우리나라에 100여개가 있고 크게 4부류로 분류할 수 있다.(선교단체TD / 독립지국TD / 목회자인도TD / 명칭변경해서 운영TD) ‘뜨레스 띠아스’에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다. 첫째로 [이후단계]를 통해 교회 밖에 새로운 교회를 만들고, 교회 안에도 당파를 짓게 된다. 둘째로 생활방식이나 가치체계에 변화가 없는 회개를 말한다. ‘아브라죠(포옹)’에도 문제가 있다. 그리고 성찬은 목사가 가르치나, 주도는 성도가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점들 보다 더 큰 문제는 상징, 성상 등은 사용하나 성경은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설교는 없고, 강의나 간증만 있다. 강의나 간증도 목회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가 한다. 왜나하면 이 운동의 태동 자체가 사제들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평신도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칙적으로 성경의 권위와 역할을 배제하는 ‘뜨레스 띠아스’운동을 약간의 변형을 통해 개신교회가 받아들인다는 것이 올바른 일인가 반문하고 싶다. 그리고, 우리는 개혁주의 개신교회의 전통대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은 성경이라는 신학을 확고히 하여 신학연구와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2-2. 2권 [신론]에 나타난 개혁주의 개신교와 카톨릭 신학 비교 연구

 

2-2-1. 개혁주의 개신교회가 바라보는 선택교리 “무조건적 선택”

 

박형룡 박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바탕으로 개혁주의 개신교회의 선택교리의 특성을 6가지고 이야기 하고 있다. 첫째로 하나님의 선택은 주권적이다. 선택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 그의 기쁘신 뜻의 표현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유로운 자비의 샘물에서 흘러 나온다 그러므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자비인 것이다. 둘째로 선택은 무조건적이다. 개신교 내에서도 알미니안주의는 예지예정설을 주장한다. 즉, 어떤 사람을 선택할 때 그 사람이 능력이 있음을 보시고 예정하셔서 그 능력에 힘을 보태셔서 칭의를 이루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다 아시고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정된 수는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혁주의 개신교는 무조건적 예정설을 지지 한다. 즉, 창세전에 정확한 숫자로 구원 받을 백성이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셋째로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중심으로 세워졌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가 선택의 기초는 아니다. 삼위하나님의 협약을 통한 선택인 것이다. 바빙크는 그리스도는 성부로부터 파송된 것이므로, 선택이 성부 자신으로부터 기인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선택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협약이다. 넷째로, 선택은 불변적이다. 선택자의 수에 가감이 없다는 뜻이다. 다섯째로 선택은 영원적이다. 창세 전, 즉 시간이 생기기 전에 예정되어 시간이 끝난 이후까지 지속되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선택인 것이다. 여섯째로 선택은 불가항적이다.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선택을 거부할 권한은 없다.

 

2-2-2. 카톨릭이 바라보는 선택교리 “신인합일설”

 

카톨릭 교리에는 선택교리는 아예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로마 카톨릭은 첼렘(영혼작용 : 자유의지), 데무트(덧붙혀진 은사)를 다른 것으로 본다. 첼렘(영혼작용 : 자유의지)은 자연인에게 주셨고, 데무트(원의)는 아담에게만 주었다. 그런데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게 되어서 데무트를 잃게 되었다고 본다. 이로 인해 인간은 부분타락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첼렘, 즉 자유의지는 여전히 가지고 있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은혜가 협력하여 칭의에 이를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카톨릭의 신인합력설이다.

그러나, 개혁주의 개신교는 첼렘과 데무트가 같다고 본다. 이 둘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같이 타락하여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것이고 인간은 전적으로 회복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2-2-3. 선택교리에 대한 인식의 차이와 “관상기도”

 

관상기도란 카톨릭의 신비주의적 영성훈련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이 관상기도가 요즘 레노바레 운동과 묶여 실시되고 있고, 한국의 유명한 목회자들(이동원, 이철신, 최일도, 이병삼, 김양재....)에 의해 실시되고 있다. 그런데 관상기도의 최종목표는 신행합일임을 알고 있는지 의문이다. 관상기도의 대가 토마스 머튼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을 강조한다. 즉, 죄로 타락한 인간은 당연히 뒷전으로 물러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하나님과 합일될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흙덩이인 인간에게 금가루가 조금 들어간다고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는가? 그런데 관상기도를 행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전적부패를 통한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과는 상관없는 직통계시와 신행합일의 목표를 관상기도를 통해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신교회들이 천주교의 수도원적 영성인 "관상기도"를 도입하는 것은 개혁주의적 방식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인간의 전적부패와 이로 인한 무조건적 선택의 교리가 흐려질 때, 우리는 카톨릭 영성프로그램인 관상기도를 수용하는데 아무 지장 없이 행동하게 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적인 교리적 바탕을 언제나 확고히 할 필요가 있다.

 

2-3. 3권 [인죄론]에 나타난 개혁주의 개신교와 카톨릭 신학 비교 연구

 

2-3-1. 개혁주의 개신교회의 하나님 형상관

 

박형룡 박사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에 대해 자연적, 도덕적, 외면적, 권위적 하나님 형상으로 서의 인간으로 나눠 설명하고 있다. 먼저 ‘자연적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인간’은 불사적인 존재였고, 성숙상태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도덕적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인간’은 무죄상태를 너머 적극적인 성스러운 상태였고, 지, 정, 의에서 최고의 성태로 완전한 조화를 지닌 존재로 창조되었으며, 하나님과 교통하도록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외면적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은 장성한 신체로 창조되었고, 죽지 않는 존재로 창조되었으며 에덴 동산이라는 최고의 환경이 조성된 곳에서 살게 된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권위적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은 하등 피조물계를 주관하는 권위를 가지고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을 종합해 보면, 개혁주의 개신교회가 바라보는 인간은 지식, 의, 거룩함으로 완전하게 지음 받은 존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불완전하게 지어 놓고 요구한다면 하나님의 성품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인간은 영생에 이르는 최고의 소질, 완벽한 형상을 가지고 태어났으나, 타락으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지 못하게 된 것이다.

 

2-3-2. 카톨릭의 하나님 형상관

 

카톨릭은 사람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으로 구별하여 말한다. 그들 가운데 성행하는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이 창조에 있어서 영혼의 영성, 의지의 자유, 신체의 불사성 같은 어떤 자연적 은사들을 사람에게 부여하셨다. 영성, 자유, 불사성은 자연적 재능들이니 이것들은 하나님의 자연적 형상을 구성하였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은 사람의 자연적 능력들을 서로 조절하여 그 열등한 것을 고등한 것 들에게 상당히 종속시키셨다. 이렇게 설정된 조화를 자연적 의라고 칭한다. 그리고도 사람 안에는 오히려 이성과 양심의 고등능력들의 권위에 반항하려는 열등한 식욕들과 정욕들의 자연적 경향이 남아 있다. 이 경향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죄를 위한 기회와 연료가 되기 쉬우니 이것이 의지의 승인을 받아 자연적 동작으로 과도하면 죄가 될 것이었다. 하나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능히 자기 열등성질을 제재하게 하시려고 자연적 은사들에 일정한 초자연적 은사들을 추가하시었다. 사람이 타락될 때 사람은 원의를 상실하였으나 인성의 원시적 소질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지금 자연인은 아담이 원의의 부여를 받기 전과 꼭 같은 상태에 있으나 다만 악에 대하여 좀 더 가한 경향을 가질 뿐이라고 한다.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카톨릭은 사람 안에 하나님 형상을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으로 구별한다. 자연적인 하나님 형상(이성)안에 식욕, 정욕 같인 것이 있는데 이 경향을 탐욕(concupiscentia)이라 했다.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해 주신 것으로 본다. 그런데 인간에게 덧붙혀진 은사를 통해 탐욕을 누르도록 유도하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덧붙혀진 은사(원의)를 잃어버리게 되어 탐욕을 억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탐욕은 인간 본성의 자연스러운 속성이다. 그래서, 카톨릭은 탐욕은 소죄라 해서 지옥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카톨릭은 죄인은 아니나 탐욕에 방치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죄는 없지만 탐심이 있기 때문에 적극적 의로움은 없다고 본다. 다만 탐욕으로 자범죄를 짓게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살아가면 자범죄로 인해 지옥에 간다고 본다. 인간이 자범죄를 억누르고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신인합력) 칭의에 이를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카톨릭의 칭의, 구원관이다.

 

2-3-3. 하나님 형상관에 대한 차이와 ‘선행’

 

김수환 추기경의 서거와 함께 카톨릭의 위상과 교인수는 늘었다. 특히 김수환 추기경의 장기기증으로 카톨릭은 장기기증을 많이 하는 종교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카톨릭에 비해 월등한 수의 개신교도들이 장기기증에 소리 소문 없이 동참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선행에 대한 인식의 차이 때문이다. 카톨릭 교리에서 인간은 죄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면 그 선이 공로로 남게 되어 있고 그것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본다. 그러나 개혁주의 개신교 교리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전적 타락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존재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선행을 한들 그것은 인정받지 못한다. 그리고 구원 얻은 이후에도 선행은 구원의 방편은 될 수 없으며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마태복음 6:3의 말씀에 준하여 실천하고 있다.

그런데, 요즘 개신교회 내에서 우리들도 카톨릭처럼 소위 언론 플레이를 해야한다는 목소리가 있다. 선행에 대한 광고를 하자는 것이다. 카톨릭 같이 고아원, 양로원, 병원, 노인복지시설 등을 할 때 큼지막하게 하고, 홍보도 하여 실추된 기독교의 이미지를 회복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의도가 과연 기독교 교리와 성경적 원리에 맞는 것인지 반문하고 싶다. 현재 많은 교회들은 복지법인을 만들어 여러 복지활동들을 한다. 그러나 정부의 돈으로 복지활동을 하는 대신 정부의 요구를 수용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계속 정부에 의존하는 복지활동에 일관한다면 많은 기독교 대학이, 많은 고아원, 양로원들이 출발은 기독교 정신으로 출발했으나 결국 사회에 동화되어버리는 것과 같은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우리는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나 전적으로 부패고 타락하여 아무 소망 없었던 존재들이었다. 그런 우린가 구원 얻게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행하는 선행은 구원의 방편이 아닌,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 쯤으로 생각하고 겸손한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바른 개혁주의 교회와 성도의 모습일 것이다.

 

 

2-4. 5권 [구원론]에 나타난 개혁주의 개신교와 카톨릭 신학 비교 연구

 

2-4-1. 개혁주의 개신교회의 신비적 연합

 

박형룡 박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구속에서 중요한 부분이지만 전 구원론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은혜언약의 복은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부터 흘러나온다. 개혁파에서 그리스도와 연합은 구원 전체의 중요점이다. 루터파에서는 인간의 구원열매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한다. 잘못하면 신비적, 현상적 연합으로 흐를 수 있다. 그러나 개혁파에서는 지극히 신학적, 구원론적 연합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실체적, 물리적, 주관적으로 봐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연합의 성격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첫째로 언약적 연합이다. 둘째로 관념적으로 형성된 유기적 연합이다.(실체적 연합이 아니다.) 구속언약의 머리와 지체로서의 연합인 것이다. 셋째로 객관적으로 형성된 생명의 연합이다. 그리스도의 의, 공로를 전가해 주신 것이다. 언약의 성취로서의 공로를 주신 것이다. 넷째로 성령의 공작(역사)에 의해 주권적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몸과 마음의 연합 같은 연합이 아닌, 신비한 연합, 의의 전가이다. 연합의 표는 세례와 성찬이다. 칭의는 세례, 성화는 성찬이다.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시작되었고, 성찬을 통해 완성되어져 간다.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전인격적 연합(자신적 연합)이다. 그리스도의 일부가 교회를 통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인격적 연합이고, 그것이 곧 교회이다. 교회가 예수님의 의를 주입해 주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2-4-2. 카톨릭의 신비적 연합

 

카톨릭에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연합, 신일합일을 말한다. 개신교에서는 의의 전가에 따른 언약적, 신학적, 구원론적 연합인데, 카톨릭은 은혜의 주입이란 말을 쓴다. 은혜의 주입을 통한 실체적, 물리적, 주관적인 연합이라는 것이다. 은혜의 주입은 공로에 따라 교회가 은혜를 넣어 준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어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칭의를 공로에 따라 교회가 은혜를 주입하는 것으로 본다.

 

2-4-3. 신비적 연합교리의 차이와 “레노바레”

 

'새롭게 한다'는 뜻의 레노바레 영성(靈性)운동은 18년 전 미국에서 리처드 포스터목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레노바레 운동이 한국에 소개된 것은 2년 전 일이다. 분당 지구촌교회에서 이동원 목사를 비롯 중진 목회자들이 '레노바레 코리아'를 결성, 본격적으로 국내에 이 운동을 펼쳤다. 레노바레는 '침묵 속에서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면서 변화되고, 이를 통해 교회와 이웃을 새롭게 하는 운동'이다. 레노바레의 6가지 핵심은 묵상, 성결, 성령, 사회정의(봉사), 말씀, 실천이다. 일각에서는 포스터 목사의 영성이 퀘이커 신앙과 가톨릭의 영향권에 있다는 의혹을 보내고 있다. 실제로 리차드 포스트는, 집회 도중에 어떤 사람을 일으켜 세운 뒤 ‘굉장한 힘이 느껴진다’거나 ‘지혜의 영이 함께함을 느낀다’고 말하는 것 같은 행동과 자기 ‘개인의 체험’을 ‘일반화’시키는 발언 등으로 인해, 한국교회 일각에서 신비주의 의혹을 받고 있다. 그리고, 레노바레의 기원이 16세기에 쓰여진 카톨릭문서에 의존하고 있기에 카톨릭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레노바레의 최종목표는 신일합일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 중보자가 빠진 체, 실체적이고, 물리적이며, 주관적인 연합을 이룬다는 것이 레노바레 운동인 것이다. 그리고 레노바레 운동의 끝에는 관상기도가 따르는 것을 볼 때에도 카톨릭과의 연관성을 부인할 수 없다.

이처럼, 실체적이고, 물리적이며, 주관적인 연합을 말하는 카톨릭의 영성프로그램이 개신교의 유명한 목회자들에 의해 도입되고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언약적, 신학적, 구원론적 연합을 말하는 개혁주의 개신교의 교리를 모르거나 중요시 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바른 연합교리를 통해, 카톨릭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3. 맺음말

 

지구는 핵과 맨틀, 지각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각부분은 뜨거운 액체로 볼 수 있는 맨틀의 위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맨틀의 이동과 분출에 따라 지진과 화산폭발이 일어나게 되고, 지각은 깨어지고 이동하며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신학이란 무엇일까? 많은 신앙인들은 신학은 고리타분한 것,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목사님들이나 연구하는 것 쯤으로 치부하는 경우들이 많다. 이는 목회자 그룹에 까지도 전염되어 요즘 WCC 운동을 하시는 분들도 “신학과 교리 문제는 접어두고 일치하자.”라고 서슴없이 말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신학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지구의 핵 부분이 삼위하나님이 계시하신 성경이라면, 신학은 맨틀과 같은 위치이고 신앙생활은 맨틀 위에 자리잡은 지각이라고 비유할 수 있다. 즉, 멘틀의 이동에 따라 지각은 크게 변화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평신도들, 그리고 일부 목회자들은 신학의 중요성을 망각한 체, 보이는 현상에만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다.

순복음의 영성에 시달린 교회들과 목회자들이 부흥(?)하고 있는 카톨릭의 ‘뜨레스 디아스’, ‘관상기도’, ‘레노바레’ 등과 같은 영성과 프로그램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 밑에 깔려 있는 신학, 성경보다 교회의 결정을 존중하고, 인간의 죄인됨을 인정하지 않으며, 신일합일을 통한 신의 경지의 연합을 말하는 그것들을 간과하는 것은 화산폭발과 지진을 염두하지 않은 체 건물을 올리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은 형국인 것이다. 우리는 박형룡 박사님의 지적을 염두하면서, 카톨릭의 신학을 바르게 알아, 개혁주의 개신교회가 물려받은 신앙의 유산, 교리적 유산을 잘 유지 발전시켜가야 할 것이다.

신학에 대한 무감각증세의 결말은 어떻게 될까? 나는 이렇게 비유하고 싶다. 시골 교회에서 예수 믿고, 대형교회에서 편하게 신앙생활 하다가, 술 담배 제사문제 등의 갈등을 피해 카톨릭으로 갔다가, 결국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며 코란을 개정한 이슬람에서 직장과 물질의 문제로 유혹하여 이슬람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결과에 이르게 되리라 생각된다. 이슬람에서는 2020년까지 한국을 이슬람 국가로 만들 계획을 세우고 대규모의 중동자금을 유입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만약 우리가 바른 신학 위에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이런 결과는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부디 아무리 좋은 도구라도, 신학적 검증을 통해, 바른 개혁주의 신학의 바탕 위에서 도입하고 운영할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하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