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는 요셉입니다. 요셉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설명은 자세히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는 신실하고 성실한 사람임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약혼자 마리아가 혼전임신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조용히 관계를 정리하려고 했던 모습에서 그의 [배려심]을, 임신한 마리아를 데리고 고생하며 베들레헴까지 와서 마리아의 출산을 위해 마구간까지 빌려 가장의 역할을 다한 모습에서 그의 [성실함]을, 헤롯왕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실을 천사를 통해 듣고 마리아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이집트 땅에서 2년을 도피해서 살았던 모습에서 그의 [생활력]을, 마리아에 비해 성경에서 부각되지 않는 모습에서 그의 [겸손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배려와 성실, 생활력과 겸손을 갖춘 요셉이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였기에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삶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롯유다는 메시아를 기다리다가 예수님을 만났지만 자신을 바꿀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메시아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는 예수님을 팔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요셉처럼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하며 하루 하루 살 수도 있고, 가롯유다처럼 내가 원하는 것이 나타날 때 까지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시계를 볼 때 대부분 시침과 분침을 봅니다. 초침이 아예 없는 시계도 있습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초침이 돌지 않으면 시침과 분침은 돌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가롯유다와 같은 인생은 많은 것을 놓칠 수 밖에 없지만, 매 순간을 성실하게 사는 요셉과 같은 인생은 내게 주어진 기회를 모두 누리는 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기회는 눈에 띄게 내게 맞추어 오는 것이 아니라, 감추어져서 오는 것임을 명심하시고, 기다리는 인생이 아닌 성실한 인생으로 기회를 만들어 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익한 종 박희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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