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많은 질병에 시달리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질병의 초기단계는 가려움, 불편함, 발열 등일 것입니다. 그 후 인간은 오랜 기간 통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통증이 질병의 처음과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질병의 마지막은 통증이 아니라 [무감각]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통증이 오히려 다시 삶의 줄을 잡을 수 있는 끈이기에 뺨을 떼려 통증을 유발시켜 정신을 차리게 하는 것입니다. 행복과 불행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과 불행도 행복을 감사하지 못하거나 불행을 아파하지 못하고 무감각해 질 때 이 둘은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에서 영적으로 무감각해진 유대인들의 모습을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퍼도 가슴치지 않는다”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세례요한이 금식하는 모습을 보고는 귀신이 들렸다고 하고, 예수님께서 식사하시는 모습을 보고는 탐식하는 자, 죄인의 친구라고 폄하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무감각했던 유대인들이 세례요한과 예수님을 비난을 하고는 있지만 결과론적으로는 영적으로 깨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무감각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얼굴에 표정은 사라져가고 있고 어린아이들의 얼굴에서도 웃음이나 울음이 없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필요한 것은 자극입니다. 긍정적인 자극이든, 부정적인 자극이든 무감각해진 사람을 깨울 세례요한, 예수님 같은 역할을 할 사람이 가정과 사회, 교회에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복음에 대한 역반응도 반응임을 기억하며, 두려워하지 맙시다.
-무익한 종 박희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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