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폭력 저항운동의 대표자를 꼽으라면 간디와 마틴 루터 킹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간디는 인도를 억압했던 영국 관공서를 파괴하지 않고 단식이라는 방법으로 스스로를 파괴했습니다. 간디의 단식이 총칼보다 무서웠던 이유는 간디가 단식하다가 죽는 날은 수억 명에 달하는 전 인도인의 거대한 분노에 직면하는 날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도 비폭력으로 저항운동을 한 사람입니다. 미국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 시내를 달리는 버스의 앞쪽 10개 좌석은 백인들 몫이었습니다. 앞자리에 앉았던 흑인들은 백인이 버스에 타면 자리를 내줘야했죠. 또 흑인들은 뒷문으로만 버스에 탑승할 수 있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을 필두로 한 흑인 시민단체는 버스 보이콧을 진행했고, 고객의 70%를 차지하던 흑인들이 1년에 걸쳐 버스에 타지 않자 버스회사는 궁지에 몰렸습니다. 킹 목사가 투옥되는 등 곡절 끝에 결국 흑인들은 위헌 판결이라는 열매를 따냈던 것입니다. 이러한 비폭력 저항운동을 처음으로 한 분이 누굴까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마태복음 26장에서 유대군병들에게 잡히신 예수님을 구하기 위해 베드로는 칼을 휘둘다가 ‘말고’라는 사람의 귀를 자르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애쓴 베드로에게 야단을 치고는 말고의 귀를 다시 붙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폭력’과 ‘복종’만이 유일한 선택이었던 인간들에게 ‘용서’라는 새로운 개념을 남겨주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힘 있는 사람의 ‘폭력’과 힘없는 사람의 ‘복종’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폭력과 복종이 아닌 ‘용서’를 선택한 사람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당신은 가정과 직장과 교회에서 ‘용서’하는 사람입니까?
-무익한 종 박희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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