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이란 전쟁이나 재난을 피해 도움을 받으러 온 사람을 말합니다. 성경에서도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돌보아 주라고 되어 있고(출22:21~27), 현대사회도 난민을 외면하지 않고 적극 돕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럽을 중심으로 난민을 돕는 일에 대한 한계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유럽에는 그리스를 통해 시리아 내전을 피해 도망쳐온 시리아 난민들과 이태리를 통해 들어오는 아프리카 난민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난민들이 머무는 도시는 지저분해지고 질서가 파괴되며, 무슬림 게토화 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난민들을 받지 말자고 주장하는 유럽인들이 늘어가고 있고, 헝가리, 체코, 폴란드와 같은 나라들은 난민의 입국을 원천적으로 불허하고 있고, 난민을 잘 받아왔던 이태리도 난민선의 입항을 반대하여 결국 스페인으로 가게 되는 일들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난민을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왜 이런 갈등들이 생겨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현대사회의 [선행에 대한 기준]이 잘못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사회의 선행의 기준은 “인본주의”입니다. 그래서 인권이라는 미명하에 무조건적으로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수용하다보니, 반대편의 사람들의 의견과 인권은 무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해결될 수 있을까요?
신명기에는 “남의 포도원과 밭에 들어가 마음껏 먹어도 되지만 담아 나오지는 말아라.”는 말씀이 있습니다.(신23:24~25) 이 말의 뜻은 선행도 하나님의 뜻에 맞춰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선행을 받는 사람들이 선행을 베푸는 사람들이 정한 규칙을 지키고, 자신들도 변화되어야만 지속적으로 그 선행의 수혜자들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선행은 수혜자도 선행자도 불행해질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머무신 것은 삭개오가 예수님의 규칙에 따라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성도들에게 무조건적은 선행을 강요하고 그렇지 못할 때 우리를 정죄하여 죄책감을 느끼게 만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도 죄인의 친구였지만 변화되지 않는 죄인은 가까이 하지 않으셨고 책망하셨음을 기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선행의 균형을 이뤄 남을 섬기시면서 지혜롭게 선행을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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