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칼럼] 주 안에 우린 하나

주전담백 主前淡白 2019. 4. 26. 11:35




요한복음 3장에는 예수님께서 유대 땅에서 세례를 베푸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세례요한도 여전히 예루살렘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사람들이 예수님의 세례를 받기 위해 다 간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세례요한은 예수님은 흥하여야겠고 나는 쇠하여야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계속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세례를 베푸시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세례요한은 왜 계속 세례를 베푼 것일까요?


그것은 세례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의 사명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의 세례는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 넘게 굳어진 유대인들의 마음을 회개를 통해 부드럽게 하는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세례는 죄 용서함을 통해 구원의 은총을 확증하는 [구원의 세례]였던 것입니다. 같은 세례라도 목적과 사명이 달랐기에 세례요한은 감옥에 갇혀 목베임을 당하기 전까지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인 회개의 세례를 계속 행했던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잘 하는 것은 남들도 그렇게 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성공한 사람일수록 남들도 자신과 같이 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생각을 가지고 부모는 자녀를 가르치고, 사장은 부하직원을 닦달하며, 교회 성도들 간에도 서로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그 가정, 직장, 교회는 하나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차이와 각자가 맡은 사명의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심지어 내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 가정, 직장, 교회에서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내가 속한 공동체의 하나됨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이해하고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모두가 나처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저 사람, 저 상황을 주신 것은 다 이유가 있을거야.’라고 생각하며 서로를 존중하여 진정한 하나됨과 행복을 이뤄 가시길 바랍니다.

-무익한 종 박희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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